마음의 작동 원리를 이토록 쉽고 간명하게 설명하는 책이 있을까.
정신과 의사로서의 경험과 지식, 개인적 불교 수행을 접목해서 쓴 책이라
귀에 쏙쏙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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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음에 어떤 속성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마음 역시 몸처럼 두 가지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속성은, 마음이 언제나 대상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상에 가 있지 않은 마음은 없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대상에 가서 그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정신이 건강하려면 자기 마음이 어느 대상에 가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하루 종일 봐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대상 자체는 건전하고 불건전하거나, 좋고 나쁘고가 없습니다. 건전 불건전, 좋음 나쁨은 마음이 대상을 향할 때 어떤 주의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이면 그 대상이 건전하고 좋은 것이 되고, 어리석은 주의를 기울이면 불건전하고 나쁜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수행할 때 대개 호흡에 집중하는데요, 호흡 그 자체가 건전한 대상인 건 아닙니다. 우리가 호흡에 건전한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챙김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편의상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마음이 좋은 대상에 가 있으면 좋은 결과가 옵니다. 편안하고 행복하고 정신이 건강해집니다. 반대로 마음이 나쁜 대상에 가 있으면 나쁜 결과가 옵니다. 괴롭고 불행하고 정신이 불건강해집니다. 마음의 첫째 원리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마음이 한 번에 한 대상에만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굉장한 치료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불건전한 대상으로 향해 있는 마음을 좋은 대상으로 향하게 하면 불건전한 대상의 영향이 그 순간 딱 끊어지고 좋은 대상의 영향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치료 과정에서 마음이 좋은 대상에 계속 향해 있도록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괴롭고 불행하고 정신이 불건강한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잘 살아보려고 하는데 어리석고 무지해서 마음이 불건전한 대상으로 가는 거예요. 경복궁에 간다고 하면서 경복궁 반대편으로 가면 절대로 경복궁이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것이 건전한 대상이고 어떤 것이 불건전한 대상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동시에 두 군데를 절대로 못 갑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요즘 멀티태스킹을 한다면서 음악을 들으며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거 착각이에요. 귀는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그리로 갑니다. 눈 역시 뭐가 보이면 무조건 그리로 갑니다. 주의가 눈으로 갔다 귀로 갔다 하는데 집중이 잘 될 리 없습니다. 그러니 정말로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려면 딱 그거 하나만 해야 합니다.
둘째 속성은, 마음이 어느 쪽으로 자꾸 가면 그쪽으로 길이 난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은 그렇게 구조화돼 있습니다. '맛지마 니까야''두 가지 사유의 경'에서 부처님은 당신이 아직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사유를 두 가지로 정해서 해보았다고 말씀합니다. 두 가지는 건전한 사유와 불건전한 사유입니다. 건전한 사유는 출리의 사유, 악의가 없는 사유, 남을 해코지 안 하려는 사유입니다. 불건전한 사유는 감각적 욕망의 사유, 악의가 있는 사유, 남을 해코지하려는 사유입니다. 그렇게 사유를 두 가지로 정한 후 감각적 욕망의 사유, 악의가 있는 사유, 남을 해코지 하려는 사유를 일으켰을 때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열반에도 도움이 안 되고 지혜가 없어지고 남과 자신을 괴롭히고 곤혹스럽게 해서 멈췄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 끝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어떤 것에 대해 사유를 거듭해서 일으키고 고찰을 거듭하다보면 그대로 마음의 성향이 된다." 불건전한 사유를 몇 번 하자 또 하려 한 것을 부처님이 느끼지 않았나 싶습니다.
뒤이어 부처님은 불건전한 사유를 멈추고 나서 출리의 사유, 악의가 없는 사유, 남을 해코지 안 하려는 사유를 하니까 열반에 도움이 되고 지혜가 생기고 남과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곤혹스럽게 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고서는 다시, 반복하는 것은 마음에 성향이 된다고 덧붙입니다.
저를 찾아온 어느 환자는 생각을 엄청 했더니만 머리에 생각이 꽉 차서 자기를 엄청 압박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생각의 방이 커지고 꽉 차서 그것들이 막 작용하는 것이지요. 마음에 길이 나는 원리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pp8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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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찾아오는 환자들이 병난 과정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대체로 이렇습니다. 순탄하고 잘 살아가는 중에 어려운 일에 맞닥뜨립니다. 거기서 자기 힘으로도 이겨내지 못하고 주위의 도움을 받아서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해서 올바르게 연구하고 대처하는 게 아니라, 다시 말해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보고 그에 맞게 대응하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생각 속에서 과거와 미래로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면서 엄청난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게 심리적 타격을 받고 뇌의 신경전달물질 대사에도 안 좋은 변화가 생깁니다. 악순환이 계속되면, 심한 경우는 정신병도 되고 신경증도 됩니다. 이 원리에 정신장애와 정신 불건강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제가 2003년에 수행하고서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지금까지 내가 생각을 많이 해서 나를 괴롭혔다'는 사실입니다. 그때부터 생각을 스톱했습니다. 그랬더니 괴로움이 싹 없어졌습니다. 크고 작은 콤플렉스가 사라졌습니다. 콤플렉스란 생각을 많이 해서 꽉 뭉친 부정적인 생각 덩어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서는 그런 게 생겨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생각을 좀 줄이면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p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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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음에 길이 날까요? 저는 마음에 길이 나는 원리를 2003년에 좌선수행을 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앉아서 수행을 하는데 생각이 탁 올라왔습니다. 제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그 생각과 관련된 다른 무언가를 하지도 않았는데 어떤 생각이 그냥 올라온 거예요. 그래서 굉장히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생각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는 놀람 속에서 그 생각이 어디서 올라오는지 계속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거대한 생각의 탱크에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봤습니다. 그 탱크 속에 든 것들 가운데서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달인의 비밀 같은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왜 물리를 잘하냐면, 생각의 탱크에 물리가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는 생각의 탱크에 음악이 꽉 차 있어서 수많은 명곡을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사람은 영어, 한국 사람은 한국어가 생각의 탱크에 꽉 차 있으므로 말이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올라오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생각의 탱크에 넣지를 말아야겠다.'
생각의 탱크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첫째, 생각의 탱크는 용량이 엄청나게 큽니다. 둘째, 생각의 탱크에 들어있는 건 지울 수 없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자료를 지울 수 있지만 생각의 탱크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이유는, 자기에게 한 번이라도 떠올랐던 것은 다시 떠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바람기가 있는 사람이 수행도 하고 좋은 친구도 만나고 술도 안 먹고 해서 바람기의 영향을 전혀 안 받는 사람이 됐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바람기 없는 사람으로 남느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어떤 조건이 마련되면, 에를 들어 술도 마시고 바람기 있는 친구도 사귀고 그러면 얼마든지 또 바람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의 탱크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또 거기서 무엇이 올라오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이냐가 결정됩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생각의 탱크에 무언가가 입력되는지도 관찰했습니다. 그랬더니 여섯 가지 경로, 즉, 눈, 귀, 코, 혀, 몸, 정신작용을 통해서 입력되었습니다. 눈으로 본 건 다 들어갑니다. 우리 눈은 기능이 탁월한 카메라여서 찍자마자 바로 저장됩니다. 귀로 들은 것, 코로 냄새 맡은 것, 혀로 맛본 것, 몸으로 감촉한 것도 마찬가지로 바로 저장됩니다.
마지막으로, 정신작용을 통해 입력되는 것인데, 이게 굉장히 무서운 겁니다. (제가 볼 때 사람에게서는 눈과 정신작용의 비중이 아주 높습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영화를 봤습니다. 둘 다 한순간도 졸지 않고 영화를 집중해서 봤습니다. 이러면 눈과 귀로 입력된 것들은 비슷하겠지요. 그런데 한 사람은 본 걸로 끝났고, 다른 사람은 영화를 본 뒤 그에 대해서 생각도 많이 하고 친구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당연히 후자에게 영화에 관한 훨씬 더 많은 것이 입력되었겠지요.
이 원리를 잘 알면 자기가 어느 때 잘했다, 잘못했다라고 생각하는 습관도 많이 줄어듭니다. 사실 우리는 준비된 만큼만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 순간에 잘하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많이 입력된 것은 잘 올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많이 하면 많이 올라옵니다. 이것이 마음에 길이 나는 원리입니다. 처음으로 호흡 수행을 할 때는 들숨과 날숨을 자주 놓칩니다. 염불 수행도 그렇고 다라니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많이 하면 잘됩니다. 자꾸자꾸 하니까 자꾸자꾸 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가면 현재로 데려오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러면 현재에 있을 때 어떤 이득이 있느냐. 무엇보다도, 과거나 미래로 갔을 때 받는 영향에서 벗어나는 이득이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에 있는 것이 확고해지면 모든 괴로움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현재에 있게 되면 현재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므로 분명한 앎이 생깁니다. 현재 일어나는 걸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왔다 갔다 하지 않고 한곳에 집중될 뿐 아니라 (보통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사라지면서 마음에 있는 아는 기능이 고도로 발휘되어 분명한 앎이 생기는 것입니다. 분명한 앎이 생기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 결과 생활에 필요하고 적절하고 분명한 지혜가 생깁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마구 뒤섞여 있으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아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해서 틀린 길로 가기가 쉽지요. 그런데 이 둘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니 확실하게 아는 쪽으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pp9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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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정신으로 살려면 생각과 실제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생각을 내려놓고 실제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실제를 보는 훈련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아침에 눈떠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잘 관찰하는 것입니다. 잘 관찰해보면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을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보통 우리는 밥을 먹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잘 모른 채 그저 '밥을 먹는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밥 먹는 걸 잘 살펴보면, 그 안에 여러 과정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밥을 보고, 숟가락을 들고, 숟가락을 밥으로 가져가서 밥을 푸고, 이번에는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오고, 그러는 사이 입을 벌리고, 밥을 입 속에 넣고, 입을 닫으며 이빨과 입술로 밥을 숟가락에서 분리하고, 밥을 씻고, 밥을 씹는 동안 침이 나오고, 밥알이 잘게 부서지고, 그러면서 죽처럼 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식도를 타고 위에 도달합니다. 밥 먹을 때 일어나는 과정은 이보다도 훨씬 더 세세하게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뒤섞여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단순화하다보니 그렇게 뒤섞이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실제를 찬찬히 볼 여유를 찾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입력되는 정보들을 어떤 패턴에 따라 자동으로 막 처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관찰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아는 것은 더 분명하게 알게 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없는지를 또 알게 됩니다. 만약 모르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으면 그걸 멈추게 됩니다. 사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아는것이 굉장한 지혜입니다.
마음에는 '아는 기능'이 있는데 생각, 감정, 선입견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너무 많이 들어 있으면 이 아는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아는 기능은 선정에 들었을 때, 특히 사선정에 들었을 때 완전하게 작동합니다. 초선정 상태에서는 일으킨 생각, 지속적 고찰, 희열, 행복이 남아 있어서 마음의 아는 기능이 온전히 작동하기 힘듭니다. 이선정 상태에서는 희열과 행복이 남아 있어서, 삼선정 상태에서는 행복이 남아 있어서 역시 마음의 아는 기능이 온전히 작동하지 않습니다. 사선정에 들어가 비로소 평온과 집중만이 남았을 때, 마음이 어떤 흔들림도 없이 뭐든지 정확히 보게 됩니다. 이걸 일상생활의 언어로 표현하면, 생각이나 감정이나 선입견 같은 것에서 빠져나와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대상을 순수하게 바라볼 때 우리가 무언가를 정확히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에 계속 집중하다보면 다른 것들이 끼어들 틈이 점점 없어져 대상을 오롯하게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내가 하는 일들과 그에 따라 일어나는 것들을 관찰하다보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전에도 이야기했듯이 생각이나 의도 같은 것은 어떤 조건들이 마련되어야 일어나는 것이지 내가 일으키고 싶다고 일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나 의도의 내용을 우리가 자유롭게 고를 수 없는데, 하루종일 내가 하는 일들에는 생각이나 의도 같은 마음 작용이 늘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몸과 마음이 어떻게 내 것이겠습니까. pp2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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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형편에 맞게 살면 힘이 하나도 안 듭니다. 반면, 돈에 관한 것이든 지식에 관한 것이든 인간관계든 형편에 맞지 않게 하면 힘듭니다. (...) 사실이 이러한데도 형편에 맞게 사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기 형편에 불만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자기가 지금 형편에 처하기까지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과정이 있는 겁니다. 인과의 법칙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는 걸 알고 현재의 형편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정신 건강에 필요합니다.
정신질환 가운데 우울증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거론되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지금 자기가 사는 실제 모습과 자기가 살고 싶은 모습 사이에 차이가 있을 때 그 차이만큼 우울증이 올 수 있습니다. 자기가 살고 싶은 모습이 있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살 의욕이 안 나는 것이지요.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남도 탓하고 자기도 탓하는 등 자기에게 해로운 여러 가지를 하면서 상황을 점점 악화시킵니다. 우울증 있는 사람은 보통 아침부터 힘들어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니까 너무 힘든 겁니다. 이를 생화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물질이 먼저는 아닙니다. 정신이 먼저예요.
마음속에 지금 현재의 삶만이 있게 해야 합니다. 삶이란 하나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결코 두 개의 삶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삶이 있기까지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삶이 힘들다면 그 이유를 찾아서 좋은 쪽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하나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잘 가꿔야 합니다. 그게 안 되고 있지 않은 것을 바라기만 한다면 현재의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습니다. pp27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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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는 어린이게도 중요합니다. 책을 읽는 중에 어린이게 잠재되어 있던 가능성이 발현되는 수가 많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더라도 그것이 발현될 조건을 못 만나면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독서를 비롯해 폭넓은 경험을 하다보면 잠재되어 있던 게 표현되는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지요. pp27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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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것을 먼저 하면 그 다음 것은 하기가 싫어집니다. 반면 즐거운 일을 나중으로 밀어두고 그렇지 않은 일을 먼저 하면, 별로 즐겁지 않은 일도 할 만해집니다. 뒤에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희망도 생기고 하기 때문이지요. 이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p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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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문제가 있다는 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토대가 구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원리로, 정신적으로 건강하려면 건강해질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되어야 합니다. 불교정신치료 관점에서, 정신 건강의 토대를 확고하게 구축하기 위해서는 유익한 마음이 계속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유익한 마음이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고 지혜가 있는 마음입니다. 해로운 마음은 그 반대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정신으로 대상을 다룰 때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함께 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면 해로운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 대상을 만나서 '이것은 영원하고 즐거움이며 실체이다'라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주의이고 해로운 마음입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 관점에서 보면, 대상을 만나서 궁극적 물질과 궁극적 정신으로 보고, 모든 것을 변하는 것이고 괴롭고 실체가 없고 깨끗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지혜이고 유익한 마음입니다. pp30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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