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톡의 중심가, 아르바트 거리는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유럽풍의 건물이 죽 들어서 있지만, 시골 소도시의 중심가 같은 느낌이 더 강했다. 건물 규모가 크지 않고 소박해서다. 그래서인지 관광객 대부분은 가까운 곳에서 온 한국인과 중국인들이다.
지금 우리는 평화롭게 이 거리를 활보하지만, 백여 년 전만 해도 여기엔 거대한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열강들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각 민족들이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하는 무대가 블라디보스톡이었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 블라디보스톡은 각별한 인연이 있다.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톡을 건설하기 시작한 구한말부터 이 지역에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설, 최재형, 이동휘, 안중근 선생이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했고, 만해 한용운 선생 등 민족의 장래를 고민하던 많은 이들이 블라디보스톡 한인촌을 한 번씩 다녀갔다.
지금 이곳엔 한인들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아르바트 거리 바로 입구, 해적까페 옆의 꽤 큰 2층 벽돌 건물 벽에 붙어 있는 작은 표지판 하나만이 그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이다. 주위 건물이 다 비슷비슷해서 일부러 찾지 않으면 표지판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아르바트의 제일 중심가에 집을 소유한 걸 보니 당시 최재형 선생이 정말 거부였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국권 상실 후 안중근, 이상설, 이위종, 이범윤, 홍범도, 신채호, 박은식, 안창호 등 국내외 애국지사들의 일차 집결지가 블라디보스톡이었고, 최재형 선생은 물심양면으로 이들을 지원했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그들의 자취가 지워졌다고 하나 모든 관광객이 한번은 들르는 아르바트 거리 일대를 우리 독립지사들이 활보했다고 생각하면 감회가 남다르다. 머릿속 안개가 걷히고 좁은 시야가 활짝 열리는 기분이다. 역사 공부를 하다보면 늘 어디선가 막막하고 뭔가 단절된 듯한 갑갑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 와서 알았다. 대륙으로 연결되는 길이 끊어지고 그 끊어진 길만큼 우리 사유와 상상의 폭도 제한된다는 것을.
우리 민족은 러시아 혁명에도 직접 참여했다.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백군과 적군으로 갈려 내전이 벌어지는데 연해주 일대에서 벌어진 전쟁을 '시베리아 내전'이라 부른다. 러시아 내전 중 가장 기간이 길었고, 일본이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우리 독립전쟁사와도 빼놓을 수 없는 전쟁이다.
일본이 황제 세력인 백군을 지원했기에 우리 독립군은 이념과 상관없이 적군 편에서 싸웠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열렬히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것은 이 일대에 세력을 확장하려는 일본을 저지하여 장차 민족의 독립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혁명이 완성되자 한국인(고려인)이 일본 첩자와 구분이 안 된다는 이유로 스탈린 시대인 1937년 약 17만 명의 한인들을 블라디보스톡 인근 역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 화물칸에 실어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으로 내쫓는다. 고려인 강제 이주의 아픈 역사와 망국의 한이 서린 곳이 또한 블라디보스톡이었다.
아르바트 거리의 끝은 해양공원이다. 바닷가 가까운 곳엔 분위기도 맛도 좋아서 내가 두 번이나 방문한 유명한 조지아 음식점 ‘수피아’가 있고, 백사장을 따라서는 러시아인들이 수영복을 입고 짧은 여름의 햇살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내 관심은 블라디보스톡의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 고대에는 발해의 영토였고, 중원 여러 민족이 거쳐 갔으며, 근대에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된 곳. 청나라, 러시아, 일본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패권 경쟁의 장이었고, 그 혼란 속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꿋꿋하게 버티며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했던 독립운동의 요람이 블라디보스톡이었다. 우리 고대사 및 근대사와 떼어놓을 수 없는 도시다.
세계사와의 연결선상에서 우리 독립투쟁사를 이해하게 된 점,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된 점이 블라디보스톡 여행의 큰 수확이었다. 블라디보스톡은 내게 역사에 대한 새로운 촉감을 선물한 도시였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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