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소환을 거절하지 않은 시인
오랜만에 문학하는 사람의 알맹이 있는 좋은 글을 읽었다.
(난 시인, 소설가들의 말장난을 좋아하지 않는다.)
노혜경 시인. 그의 페미니즘, 문단 권력에 대한 비판, 시와 문학 및 친일 문학인에 대한 견해, 그의 정치 참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역사가 그를 어떻게 소환했으며 그 질곡 속에서 시인이 어떻게 역사와 호흡했는지, 역사의 소환을 거절하지 않고 지금까지 걸어왔는지를 찬찬히 읽을 수 있다. 문학인으로써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자 한 그에게서 참 지식인의 모습을 본다.
노혜경은 서정주는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삶은 비판하지만 그의 문학적 성과는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시인을 상상력의 힘으로 사회에 발언하는 '지식인'으로 명백하게 규정하고, 그의 모든 행위는 역사 앞에 평가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한다. 깊이 공감했다.
나는 서정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미당>이란 예쁜 호가 역겹다. 김구 선생의 호 <백범>은 백정처럼 범상한 사람을 뜻한다. 조선의 백정처럼 낮은 사람까지 독립의 의지를 가져야 우리 나라가 독립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리 춤춘들 저리 춤춘들 어떠리...' (학이란 시였지 싶다)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자화상)
정권에 빌붙어온 그의 행적은 둘째로 치고라도 시에서 드러난 그의 정신 수준을 보라. 왜 뉘우치지 않는가.
그는 가짜다. 가짜 허무주의자다. 그가 진짜 허무를 알았다면, 역사 앞에 몸을 던졌으리라. 그에겐 생이 얄팍한 허무였으므로, 이리 살든 저리 살든 뉘우칠 필요가 없었다. 가슴을 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의 정신이 그토록 천박한 것에 놀라는데, 그가 빛나는 문학적 성과를 이루었다는 문학인이 많으니 참 놀랄 노릇이다.
또 인상적인 것은 <밥, 꽃, 양>.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 <밥, 꽃, 양>에 대한 부분은 눈물을 머금으며 읽었다. 현대 노조원들이 어떻게 같은 어엿한 노조원인 식당의 밥하는 아줌마들을 그렇게 비열한 방법으로 쫓아냈는지를, 권력에 저항한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밟을 수 있는지를 보며 남성 위주의 노조가 그 정도 수준 밖에 되지 못함에 놀랐다.
밥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 밥을 해온 여성들은 남성 노동자들에 의해 철저히 버려졌다. 진정 인간을 해방하는 운동, 그 온유한 사랑을 지닌 이들이 그립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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