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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시와 소설

뿌리 깊은 나무 1~2 - 이정명

by 릴라~ 2008. 10. 24.

뿌리깊은 나무 1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이정명 (밀리언하우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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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에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 2006년에 나온 책인데 모르고 있다가 한 학생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시대는 세종조, 집현전 학사들이 하나 둘 의문사하는데, 그 죽음의 비밀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의 소중한 면면들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읽으면서 내내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했다.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젊은 수사들이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맞는 추리 소설의 구조가 경복궁 집현전 학사들의 연이은 죽음과 유사하며, 그들의 죽음의 배후에 의문의 책(금서)이 있다는 점,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이 변화한 시대에 새로운 사상을 추구하는 신진 학자들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노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점도 동일하다.

그러나 전체적인 얼개가 비슷하다고 해도, 그 얼개를 채우고 있는 내용의 신선함 때문에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을 만큼 재미있게 읽었다. 성삼문, 장영실, 정인지 등 세종조 인물들을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되는 기쁨이 있었고, '한글 창제'가 비밀을 푸는 열쇠라는 점, 학사들 뿐 아니라 반인 가리온과 무사 무휼, 나인 소이 등 다양한 계층의 삶의 목소리가 한 데 어울려서 '한글 창제'로 대변되는 시대 정신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점이 감동적이다. 사건이 경복궁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점은 소설의 긴장감을 더해준다.

사건의 개연성 측면에서는 아쉬운 부분들이 없지 않은데,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끌고 나갔다고 생각한다. 예상가능한 결말이었지만, 작가가 어떻게 그 지점까지 도달해낼 지가 궁금했기 때문에 그 점이 독서를 방해하진 않았다. 사실 이러한 아쉬움은 어른 독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고, 청소년이라면 마냥 재미있게 읽었으리라.

이 소설에서 제일 마음에 와닿았던 건 주인공 채윤이었다. 지위가 낮은 겸사복인 그가 한 시대의 풍랑에 온몸으로 맞서며 고독하게 걸어가는 모습에서 나는 그 시대나 오늘 이 시대나 동일하게 요구되는 삶의 자질, 젊은 영혼만이 지닐 수 있는 고결한 이상을 보았기에. 채윤은 때로 좌절하고 비애에 휩싸이지만 결코 세상에 물들지 않았다. 시대의 어둠을 물리치는 젊은 정신의 빛. 그것이 채윤이 내게 준 위로다.

아마도 채윤은 작가의 분신이 아니었을까? 얼마 전 이정명씨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눈빛을 보니 머리가 좋아 보였고, 또 무척 맑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인상도 더불어 받았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 돈과 건설과 강남과 땅부자들만 설쳐대는, 무식이 판을 치는, 지성의 빛이 사라진 이 시대에, 정말이지 집현전 학사들과, 세종과, 채윤 같은 사람들이 그립다. 그런 맑고 의로운 정신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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