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기울면 포장마차의 등불이 하나씩 켜지고,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방금 배낭을 메고 도착한 사람, 까페에서 시원한 맥주잔을 들이키는 사람,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사람, 물건을 사려고 흥정하는 사람, 이 모든 것을 구경하는 사람... 열대의 무더운 날씨 속 '사람'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실로 강렬하다.
방콕은 그간 여러 번 경유했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어 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박준의 책을 읽고 카오산 로드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카오산 로드,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각양각색의 여행자들이 내뿜는 활력과 에너지다. 히피들의 시대는 갔지만, 그 후예들이 또 다른 종류의 자유를 찾아 전세계에서 속속 모여드는 곳.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넘실거리지만,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젊음의 에너지 그 자체다.
발리의 꾸따 비치와 일면 비슷하지만 상업화된 꾸따에 비해서 훨씬 생동감이 느껴지는 카오산. 카오산도 예전에 비해 점점 정형화되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곳에는 아직 '방랑'의 불씨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근처 람부뜨리 거리에 잠시만 거리에 서 있어도 집채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막 카오산에 도착했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과 끊임없이 마주치게 된다.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공연히 행복해지는 건 나만이 아니리라.
아시아에는 이처럼 유럽인들이 만들어놓은 해방구가 곳곳에 존재한다. 싼 물가, 그리고 유럽처럼 시스템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만끽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그 이유일 것이다. 한 편으로는 씁쓸하고 배가 아프지만 또 한편으로는 60-70년대 서구 사회를 휩쓸었던 반문명/탈사회 운동의 남은 흔적을 느낄 수 있어서 반갑기도 하다.
미국이 주도한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그에 맞선 테러리즘이 세상을 온통 휩쓸고 지나간 지금, 여행의 낭만이 과거보다는 많이 사라졌다. 낯선 이를 환영하기보다는 돈줄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점점 팽배해지는 것 같다. 세계여행이 보편화되면서 가슴으로 여행하는 사람들보다는 눈으로 즐기는 관광객이 훨씬 많아졌다. 정처없이 방랑하는 한 명의 순례자를 만나고 싶다면, 이제는 히말라야 깊은 산골의 무스탕이나 라오스의 오지, 아니면 저 티벳의 차마고도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비록 잠시일망정 히피가 되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아무 목적 없이 여행이란 대체 무엇인가를 절절히 느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카오산으로 가보라. 그곳에는 아직 히피들이 멸종되지 않았으니까. 그들의 열정적인 눈빛과 배낭을 울러맨 튼튼한 어깨가 증명해줄 것이다. 사랑이건 증오건 절망이건 좌절이건 그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딘가로 성큼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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