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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사회, 과학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고미숙 ㅡ 연애불능의 시대에 저자가 전하는 사랑법

by 릴라~ 2009. 1. 29.

호모 에로스는 호모 쿵푸스다

 

고미숙의 책을 그간 몇 권 읽을 것 같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는 아주 좋았고,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보통이었고, <호모 쿵푸스>도 보통이었고, <나비와 전사>는 실망이었다. 그리고 새로 나온 책 <호모 에로스>는 아주 좋았다. 전작 <호모 쿵푸스>보다 생각할 거리가 많다. 이 분의 발랄한(?) 문체를 내가 썩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에서는 그게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시종일관 즐겁게 읽었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이 책은 우리 시대 사랑과 연애의 풍속을 되짚어보고,저자의 사랑관을 들려준 다음, 사랑의 달인 호모 에로스가 되기 위한 초식을 제시한다.

 

1. 먼저 현실 인식. 저자는 이 시대를 연애불능의 시대로 진단한다. 대중매체를 보면 바야흐로 연애만능의 시대가 도래한 것 같지만 이는 표피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작업의 공식, 이벤트, 기념일 챙기기, 각종 쇼만 난무할 뿐, 인간과 인간의 몸이 맞부닥치면서 벌어지는 사건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작업’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지극히 계산적이다. 사랑을 비즈니스의 하나로 간주하는 이들은 사랑의 희열을 맛보기 어렵고 자기 삶과 운명의 진정한 주체가 될 수도 없다. 특히 사람 각자가 지닌 차이가 사라지고 비슷비슷한 조건과 외모의 사람들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연애는 비슷비슷한 삶의 행로로 귀결된다.

 

그 결과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온 국민의 동안 열풍에도 불구하고 젊음의 정신--모험심, 탐구심, 생명력--은 사라진 세상이 되었다. 사랑의 열정을 누려야 할 청춘도 없다. 이팔청춘들은 학원과 고시원에서 젊음을 소진한다. 매끈한 얼굴에 대한 동경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누르고, 생의 약동으로서의 에로스 대신에 음란물이 주는 자극에 의존하는 시대. 삶의 변혁이 아니라 정서적/감정적 만족을 위해 사랑을 조금씩 구매하는 시대. 자본주의적 동선은 몸이 아니라 끊임없이 돈을 쓰기를 강요한다. '소비로 맺어진 연애'. 여기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하지 싶다.

 

2. 그렇다면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째, 저자는 사랑을 ‘몸적 사건’으로 간주한다. 사랑은 내 몸의 조성과 타인의 몸의 조성이 만나고 섞여들면서 새롭게 형성되는 관계의 장이다. 머리로 계산하는 데 익숙한 현대인들은 몸과 몸이 만나면서 촉발되는 신선한 열정 속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둘째, 사랑은 일대 사건이므로 '시절인연'이 맞아야 한다. 시절인연이란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두 사람이 어떤 강한 촉발에 의해 공통의 리듬을 구성하게 된 특정한 시간대.”다. 시절인연이 안 맞으면 사랑은 어긋난다. 헤어짐은 당연하고 또 자연스러운 일이다. 셋째, 사랑은 만남이라는 사건에서 촉발된 에로스의 힘으로 일상의 리듬을 바꾸고 삶의 조건을 바꾸고 자신을 바꾸는 '혁명'이다. 삶이 바뀌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저자에게 있어 사랑의 문제는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장’을 창조하는 자신의 역량의 문제가 된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말한 관점과 동일하다. 사랑은 삶을 창조하는 능력,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며, 스피노자적 의미의 '힘의 증대'이다. 몇몇 독자들이 사랑은 ‘대상’과 관련이 없다는 자자의 사랑관에 의문을 표시하지만, 내가 보기에 저자는 사랑의 ‘대상’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만나기에 앞서, 준비하고 갖추어야 할 ‘삶의 태도로서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상을 ‘만날 수 있는’ 능력이자, 원하는 대상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3. 마지막으로 사랑법. 저자는 ‘공부하라’고 외친다. 자기 자신과 상대방과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들을 치열하게 관찰하고 공부하라고. 그렇게 관찰한 힘으로 일상의 습관을 바꾸고, 동선을 바꾸고, 새로운 활동에 참여하고, 지식을 확장하고 안목을 확장하면서 자기 몸의 능력을 키워가라고.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는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변화하고 온몸으로 자기 ‘운명’을 만들어가면서 에로스가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고. 몸을 쓰지 않고, 습관을 바꾸지 않고, 동선을 바꾸지 않고, 입으로만 백날 사랑을 외쳐봤자 소용 없다고.

 

따라서 저자에게 있어 사랑하려는 인간의 열망은 세계을 탐구하려는 열망과 본질에서 동일하다. '호모 에로스는 호모 쿵푸스다', 혹은 '호모 에로스는 호모 쿵푸스가 되어야 한다', 이 책의논지를 한 마디로 말하라면 이것이 되겠다. 빌헬름 라이히가 말한 이상적인 삶, ‘사랑, 노동, 지식’이 하나가 되는 삶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저자의 사랑관/사랑법이 기존 철학자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책에서 이야기하는 현실의 모습이 21세기 한국이고, 우리 삶의 자본주의적 구조와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배치’와 ‘동선’의 개념으로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점이 이 책을 신선하고 생기 있게 만든다. 에로스가 사라진 이 시대에 ‘호모 에로스’라는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사랑에 대해서라면 수만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으리라.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 사랑과 공부를 실천하는 세상. 그렇게 삶을 개척해가는 세상. 그럼으로써 자기 운명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세상. 다름 아닌 내가 꿈꾸는 세상. 에로스의 힘과 아름다움이 물욕/권력욕을 능히 물리칠 수 있기를. 책장을 덮으면서 드는 바램이다.

 

 

sheshe.tistory.com/476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 고미숙

워낙 대중적이고 재미있게 글을 쓰는 작가라서 이분의 책은 대충 다 읽은 듯. 학문적 엄밀성이 부족하고 가볍다는 평도 많지만 인문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는 결코 적지 않다. 나는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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