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아니, 도스토옙스키가 이렇게 수다쟁이였나. 말 그대로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인물들에 대한 끝없는 묘사와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의 향연... 작가의 수다는 주연, 조연 가리지 않고 끝이 없어서, 마치 그 시대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서 내가 그 동네 까페에서 이야기를 엿듣는 것 같았다. 대화는 또 왜 그렇게 긴 지... 장광설에 다소 지칠 만하면서도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건 정말 다음 장면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작가의 필력이 실감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한 권에 600페이지가 넘는 3권의 책을 끝마칠 무렵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아니고, 엉엉 울고 있다. 그렇게 드라마틱한 결말이 아님에도...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들이 그렇게 참신한 내용이 아님에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고교 때 읽었을 땐 전혀 알지 못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물욕과 육욕 밖에 모르는 타락한 인물 아머지 카라마조프, 선량함을 갖추고 있지만 물불 안 가리는 다혈질의 성격에 자제력과 판단력이 부족한 첫아들 드미트리, 현명하고 박학다식하지만 삶에 대해 근본적으로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둘째 이반, 그리고 순수함의 표상 막내 알료샤. 알료샤가 드미트리와 이반에 비해서는 다소 평면적인 캐릭터라는 느낌을 주지만, 이 알료샤의 존재가 어질어질할 만큼 탐욕과 위선과 고통으로 중첩된 당대의 삶을, 이 소설 자체를 정화시켜주는 존재였다. 알료샤가 등장하면 뭔가 공기가 달라지는 것처럼 장면의 분위기가 바뀌고, 읽는 내 마음도 평온해졌다.
드미트리의 무분별한 열정은 그를 파국으로 이끌고, 이반의 예리한 지성은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 유명한 대심문관 이야기는 누구나 이반의 고뇌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신이 만든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범위를 한정해 특히 어린이들의 고통을 참을 수 없다고. 그가 예로 드는 당대의 풍경은 참혹했다. 하나만 소개하면, 한 농노의 아이가 있었다. 실수로 던진 돌이 주인 귀족의 사냥개의 다리에 맞게 되고 사냥개는 약간 절룩거린다. 사태를 알게 된 귀족은 아이를 발가벗겨 광에 가두고, 다음날 그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발가벗은 아이를 달리게 하고 자신의 사냥개를 풀어놓는다. 아이는 겁에 질려 도망가지만 결국 사냥개가 아이를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당시에도 형법이 있어 귀족은 곧 체포되지만 몇 달만에 풀려난다.
당시 히스테리 비슷한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여인이 많다는 것도 새로웠다. 사람들은 정신줄을 놓은 부인들이 악마에 시달린다고 생각하고 수도원 암자에 데려가곤 하지만 작가는 정확하게 서술한다. 고된 출산과 연이은 가혹한 노동이 그 원인이라고. 그렇게 마음이 병든 여인들이 많은 시대였다.
이반의 학식은 이반 자신을 고뇌에서 꺼내지 못했고, 다른 이들을 구해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인간적이고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이반은 결국 끔찍한 비극을 막지 못한 자신의 무책임함에 고뇌하고 자책하면서 생사를 오가는 정신적 위기에 처하게 된다. 즉, 그의 질문과 고뇌는 숭고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그를 삶에 대한 냉소로 이끌었고, 그 냉소는 그를 행동하는 사람보다는 방관자의 위치에 머물게 했다. 그의 부친 카라마조프가 어떤 인물인지 알기에 그 냉소가 십분 이해되지만...
그렇다면 알료샤는 어떻게 이반과 다른 길을 가게 되었을까. 생물학적 아버지는 카라마조프였지만 그의 정신적 아버지는 조시마 장로였고 알료샤는 그를 온마음으로 흠모했다. 조시마 장로가 어떤 인물인가보다는 그 흠모와 사랑이 특별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알료샤의 마음은 그에 대한 맑고 깨끗한 사랑으로 가득했기에 그의 지성은 이반과는 다른 길로 꽃피기 시작한다.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로부터 진리에 대한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세속적인 모든 것, 아버지 카라마조프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다. 거울처럼 바라보면서 도움을 주려 하거나 그저 자기의 소임을 다할 뿐이다.
이 위대한 소설은 알료샤가 만난 어린 소년, 일류샤의 장례식 장면으로 끝이 난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던 스메기료프 대위와 그의 아들 일류샤의 이야기는 너무 애처로워서 가슴을 콕콕 찌른다. 형편없는 아버지에 대한 아이의 용감하고 무모하고 순수한 사랑이 주는 감동 때문이다. 일류샤와 콜랴를 비롯한 십대 아이들의 에피소드도 이 소설에서는 굉장히 생동감 넘치게 그려지고 있는데, 소설을 쓸 무렵 도스토옙스키에겐 매우 늦은 나이에 얻은 열 살 무렵의 아이들이 있었다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료샤는 말한다. 우리가 일류샤를 영원히 기억하는 한, 우리는 구원된 거라고. 그의 용감함과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일류샤를 향한 우리의 안타까움, 슬픔, 사랑과 일류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모여 하나가 된 것을 절대로 잊지 말자고. 작가는 아마도 그 고귀하고 순수한 감정이 생의 본질이자 희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일류샤의 처지를 알고 괴롭히던 친구들이 알료샤의 개입 덕분에 일류샤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도 작가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소설에는 드미트리의 약혼녀 카타리나, 드미트리와 그의 부친이 동시에 반한 그루셴카, 집사 그레고리, 하인 스메르쟈코프, 호흘라코바 부인, 라키친 등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이야기 속에 차지하는 비중과 상관없이 모두 생동감이 넘친다. 그런 다양한 인물들이 교차하며 그려내는 욕망의 최정점에 카라마조프가 있었다. 카타리나와 그루셴카는 탐욕스러운 인물은 아니지만 각자 다른 어떤 정신적 욕망의 회로를 갖고 있었고 작가는 섬세하게 그 욕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여준다. 이 욕망의 파고 속에서 어려서부터 줄곧 생을 증오해온 스메르쟈코프는 그 증오를 실행에 옮긴다.
결국 카라마조프가의 이야기는 살인이라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그 모든 비극의 와중에 알료샤는 한 줄기 빛으로 등장한다. 알료샤가 그가 본 모든 세상의 그 질척거리는 풍경 속에서 건져올린 구원은 일류샤와 아이들과 나눈 추억이었다. 어린 시절의 고귀한 추억이야말로 인간을 이후 겪게 될 모든 타락으로부터 지켜주고 선한 본성을 지켜주는 방패라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과거 조시마 장로가 그에게 그랬듯이. 알료샤가 아이들과 나눈 순수한 우정은 카라마조프 일가의 온갖 욕망과 다툼의 서사와 대조되면서 강렬한 힘을 발휘했다. (엉엉 울었음 흑흑) 1권부터 3권까지 끝까지 읽어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장편소설이 주는 묵직한 감동의 원천이다.
그것은 인생의 본질에 대한 커다란 질문 앞에 작가가 내어놓은 답이기도 하다. 작가가 알료샤와 아이들로부터 묘사해내고자 하는 것, 인간 본성의 선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비극과 고통으로 점철된 와중에서도 인류의 항해가 아직은 계속되는 것일 테다.
서양 고전 장편소설 중에 여태 읽은 최고 작품은 '레미제라블'이었는데, 이 책으로 바꿔야 하나 싶다. 일단 두 작품을 다 한 번씩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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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명심해야 할 것은, 앞으로의 인생을 위하여 뭔가 훌륭한 추억, 특히 어린 시절 부모님 슬하에 있을 때 갖게 된 추억보다 더 숭고하고 강렬하고 건강하고 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많이들 하지만, 바로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아름답고 성스러운 추억이야말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그런 추억을 많이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구원받은 셈입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속에 단 하나의 훌륭한 추억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덕분에 언젠가는 구원을 향해 한발짝 더 다가가게 될 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훗날 악한 사람이 될지도, 심지어 고약한 행동 앞에서 버텨 낼 힘을 잃을지도, 인간의 눈물을 조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물론 그럴 리도 없겠지만, 여하튼 우리가 아무리 사악해질지라도, 우리가 일류샤를 어떻게 땅에 묻었는지, 우리가 최근에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바로 지금 이 바윗돌 옆에서 다 함께 얼마나 사이좋게 얘기를 나누었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 중 가장 잔인하고 가장 냉소적인 사람조차도, 설령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지금 이순간 선량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점만은 마음속으로 감히 비웃지 못할 겁니다! 그뿐입니까, 어쩌면 바로 이 추억 하나만 있어도 그는 스스로를 거대한 악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 것이며, 생각을 고쳐먹고 '그래, 그 시절엔 나도 선량하고 용감하고 성실한 인간이었지.'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p581-582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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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왜 우리가 고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첫째, 그 무엇보다도 선량하게 살고, 둘째 성실하게 살아갑시다. 그 다음으론 절대로 서로서로를 잊지 맙시다." p583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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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진짜로 종교에서 말하듯, 우리 모두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생명을 얻고, 서로서로를, 모든 사람을, 일류셰치카를 다시 보게 될까요?"
"꼭 되살아나서 꼭 다시 보게 될 것이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즐겁고 기쁘게 서로서로 얘기하게 될 겁니다." 반쯤은 웃고 반쯤은 환희에 젖어 알료샤가 대답했다. p585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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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욕구가 있다면 그것을 실컷 충족시켜랴, 왜냐면 누구나 아주 명망 있고 아주 부유한 사람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으니까.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두려움을 갖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증대시켜라."라고 말하고 있으니, 자 바로 이것이 지금 세상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자유를 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욕구 증대의 권리에서 도대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부유한 자들에게는 고립과 정신적인 자살, 가난한 자들에게는 질투와 살인이 있을 뿐이니 -- 이는 권리를 주었으되 욕구를 만족시킬 수단은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은 날이 가면 갈수록 거리를 축소시키고 공중으로 사상들을 전달함으로써 더욱더 합일에 다다르고 형제와 같은 관계를 갖게 될 것이라고들 단언합니다. 오호, 사람들의 이런 합일을 믿지 마십시오. 자유를 욕구의 증대와 시급한 해소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왜곡하는 것이니, 왜냐면 그들의 내부에서는 무수한 어리석은 욕망들, 습관들, 터무니없는 발상들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p81 (2권, 조시마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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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상에서 우리는 참으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니, 만약 그리스도의 귀중한 형상이 우리 앞에 없었더라면, 우리는 대홍수 직전의 인류처럼 파멸하여 완전히 길을 잃었을 것이다. (...) 만약 그대의 내부에서 이 감각이 약해지거나 없어진다면, 그대의 내부에서 자라난 것도 죽을 것이다. 그때는 삶에 무관심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p97 (2권, 조시마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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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시마 장로가 설교 중에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의인의 몰락과 그의 치욕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p115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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