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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들뢰즈 철학에 대한 비판

by 릴라~ 2009. 6. 27.

1. 홍준기 : 들뢰즈의 영향으로 ‘모순’이라는 범주를 불필요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국내의 프랑스 철학 연구자들 사이에 생겨나는 경향이 있다.

--> 신지영 : 차이 그 자체의 영역에서 부정이나 모순을 대체하는 개념은 무엇일까. 그것은 차이가 아니라 거리이다. 거리와 간격이 존재하는 이 영역에는, 들뢰즈가 말하듯 조금도 미규정적이지 않은 부정 관사나 부정 대명사, 미분화된 것은 아니지만 과정을 나타내는 부정법 동사, 사람이 아니라 사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우글거린다(디알로그 146). 들뢰즈의 차이가 부정을 내포하지 않기때문에 규정도 조직도 생각해내지 못했다는 것은 그러므로 오해다.

2. 신지영 : 라깡이 분석의 끝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시니피앙으로 이루어지는 분석을 통해 시니피앙 너머에 도착하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일 것인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들뢰즈는 전체-되기(운동)를 말하는데 헤겔·라깡은 전체라는 미래로 가기(가짜 운동)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혁명적으로-되기가 아닌 언제나 오지 않을 혁명의 미래 말이다.

-->홍준기 : 분석의 끝이란 헤겔식으로 말하면 이념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 즉 부정성과 모순을 극복하고 혹은 인정하고 ‘긍정성’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깡은 분석의 끝에서 주체가 도달하는 상태를 ‘주체적 궁핍’이라고 불렀고, 이것은 ‘존재의 (포기가 아니라) 획득’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라깡에서 분석의 끝은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긍정적인 현재적’ 사건으로서, ‘오이디푸스의 너머’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 박사는 분석의 끝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어째서 들뢰즈가 말하는 전체되기는 가능하고, 라깡이 말하는 전체되기(분석의 끝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한가. 오히려 들뢰즈가 말하는 전체되기가 더 불가능한 것인 아닌지. 하지만 신 박사는 “시니피앙으로 이루어지는 분석을 통해 시니피앙 너머에 도착하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신 박사는 라깡은 결코 시니피앙만 가지고 작업을 하지는 않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들뢰즈와 달리 라깡은 충동, 실재, 기호, 기표(시니피앙), 수학소, 상상계 등 다양한 범주들을 반드시 필요한 범주들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결코 시니피앙만 가지고 작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다. 여기에서 라깡과 들뢰즈의 중요한 차이가 드러난다. 

3. 신지영 : 둘째, 차이의 사회학적인 무능력에 대한 비판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이를 그저 다름으로만 바라본다면 사회적 강자와 약자의 대립 혹은 모순 관계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 경우에 들뢰즈가 그저 다름(외국인 노동자와 다른 노동자와의 차이)으로 문제를 바라볼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시 들뢰즈 연구자로서 그렇게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들뢰즈에 대한 지나친 오해이다. 아마도 들뢰즈의 차이 그 자체를 실체적 개체들을 구성요소로 하는 집합으로서의 전체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오해를 하는 것 같다.

위의 다름은 들뢰즈가 그렇게도 강조한 파생적 차이를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이러한 맥락이 여성주의에도 적용되는데, 여성이 남성의 그림자가 아니라 여성 그 자체의 여성성을 갖는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여성주의라면 이 역시 들뢰즈의 차이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차이 역시 파생적 차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라면 이 문제를 모순으로 푸는 대신, 배치와 홈패인 공간, 힘의 강도, 약함과 강함 등으로 풀 것이다. 들뢰즈가 사회적 강자 집단과 사회적 약자 집단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힘, 힘의 강약, 자본이라는 흐름, 포획, 배치와 같은 것들이다. 사회적 약자 집단이 사회적 강자 집단을 부정하면 대립이 해소되는가. 들뢰즈는 대립과 부정으로 문제가 풀리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표면적 대립의 이유와 의미를 밝히고 거기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 홍준기 :  헤겔이 모순과 부정이라는 범주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들뢰즈가 헤겔을 비판했다는 신 박사의 주장은 올바른 주장일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정확히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들뢰즈는 결여와 모순이 없는 스피노자의 존재론, 혹은 슈레버의 정신병적 존재론을 배타적으로 특권화하는 이론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 박사는 모순과 부정의 범주가 없어도 규정과 조직이 생겨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지만, 사실 이때 가능한 것은 단지 정신병적 규정과 조직이라는 것이 라깡·헤겔의 논지다. 또한 신 박사도 인정하고 있듯 모순과 부정 개념을 제거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약자와 강자의 문제를 ‘진정으로’ 사유할 수 없다. ‘정신분석학의 전문가’인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적·정신분석적 해석을 요청한 것은 따라서 결코 우연이 아니다.

4. 박찬국 :  레만의 '포스트모던적 좌익 니체주의'(푸코/들뢰즈의 니체 수용에 대한 비판) 서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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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변증법이 차이를 무시하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총체적인 종합의 틀안에 가두게 된다고 본다. 들뢰즈의 변증법 비판에 대해서 레만은 들뢰즈가 헤겔의 사변적인 변증법을 변증법 자체와 동일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들뢰즈가 부정, 대립 그리고 모순이라는 변증법의 사변적 원리에 대해서 그에 못지않게 사변적인 원리인 차이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 실제적인 대립관계를 단순한 차이로 보는 것은 사회적인 현실에서는 다양한 차이들이 사실상 서로 간의 적대적인 대립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 들뢰즈는 자신의 ‘차이’개념을 니체가 말하는 ‘거리의 파토스’라는 귀족주의적인 열정으로부터 끌어내고있다. 그러나
니체에서 신분적으로 고귀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의 간격을 가리키는 이 개념은 들뢰즈에서는 생을 긍정하는 능동적인 힘들을 수동적이고 생을 부정하는 힘들로부터 구별하는 ‘차이’로 변형된다. 니체에서는 정치적인 위계질서를 정당화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 개념이 들뢰즈에서는 그러한 정치적인 성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 레만은 포스트모던적인 니체주의는 사회에 대한 넓은 의미의 비판이론과 사회과학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볼 때 해롭게 작용했다고 본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보다 섬세한 사회분석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를 전복시키겠다는 제스처만 취할 뿐 그때 그때의 사회구조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분석도 변혁의 방안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던적인 니체주의가 어떻게 해서 유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레만은 나름대로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푸코와 들뢰즈에 의해서 재평가된 니체는 급진좌파들에게 사회변혁을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실천적인 방안도 제시하지도 추구하지도 않으면서도 자신들이 급진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전쟁’과 ‘전쟁기계’라는 들뢰즈의 은유가 들뢰즈의 난해하기 그지없는 비교( 敎)적인 철학적인 담론에 게릴라 전쟁이라는 혁명적인 색채를 부여하고 있다. 레만은 이러한 실속 없는 과격함이 치루는 대가는 좌익으로도 우익으로도 기울 수 있는 정치의 모순적 미학화(eine widerspruliche Asthetisierung des Politischen)라고 보고 있다.


- 레만이 강조하듯이 니체 사상이 갖는 엘리트주의적인 성격과 반민주주의적인 성격은 우리가 니체를 해석함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라고 여겨진다. 니체 사상의 엘리트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성격은 레만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의 후기 사상에서만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니체의 사유도정 전체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니체의 형이상학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형이상학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레만은 니체 철학의 이러한 성격을 강조하면서 들뢰즈와 푸코 사상이 갖는 문제점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고 있다.

- 레만은 포스트모던적인 니체 해석이 갖는 문헌학적인 문제성과 이론적인 약점들이 대부분의 이차문헌들에 의해서 무시되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레만은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염두에 두고 들뢰즈와 푸코를 읽을 때 그들의 생산적인 통찰도 제대로 살릴 수 있다고 본다.

- 니체는 미래에 구현되어야 할 유토피아란 기독교의 피안에 대한 대용개념일 뿐이라고 본다. 그는 동물사회에서 동물들 간의 대립과 갈등이 불가피한 것처럼 인간 사회에서도 집단들 및 개인들 간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고통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대립과 갈등 그리고 고통은 인간 개개인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본다. 이는 하나의 나무가 강하게 자라기 위해서 온실이 아니라 폭풍우가 필요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레만이나 들뢰즈나 푸코처럼 차이에 대한 존중이 지배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에 대한 레만의 비판이 부당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적인 사회분석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 레만의 비판은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에 대한 레만의 비판은 이러한 특정한 관점에 구속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을 떠나 니체 자신의 문제의식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을 비판하는 길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길은 레만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이 갖는 문제점을 밝혀 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을 비판할 때 우리 시대에 니체가 갖는 의미도 새롭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요즘 인문학에 좀 염증을 내고 있다.  해석에 또다른 해석이 난무하고, 원 저자들이 무엇을 주장했는지 분명치 않지만... 그래도 홍준기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들뢰즈 철학에 대한 담론들이 뭔가 얄팍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부정을 내포하지 않은 긍정의 얄팍함, 자기 극복이 없는 무한한 생성/변이의 얄팍함이 아닐까. 물론 내가 들뢰즈를 오독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사회적 모순과 대립이 '차이의 공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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