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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들뢰즈의 기여 및 한계 - 이성백

by 릴라~ 2009. 6. 28.
이성백 <변증법 비판으로 독해한 들뢰즈의 니체 해석>에서 결론만 옮김
최근 읽은 글 중 가장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줌


(1) 들뢰즈는 차이의 개념을 통해서 사물의 근원적인 존재방식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새로운 시각을 열어 놓았다. 대립과 모순을 사물의 근원적인 존재방식으로 이해하면서 변증법이 차이를 적극적으로 사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변증법의 한계를 적절하게 지적하였다. 모순이 아니라 차이가 사물의 근원적인 존재 방식이고, 모순은 차이로부터 파생된 개념이다. 변증법은 모순을 사물의 근원적인 존재 방식으로 고정시킴으로써, 차이를 제대로 사유할 수 없었다.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모순으로만 봄으로써, 변증법은 관계를 부정적 관계로만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차이의 긍정은 사물들 간의 관계를 긍정적 관계로 개념화할 수 있는 사유의 길을 열었다. 변증법의 확장 속에서 다루어질 수 있던지, 아니면 변증법 바깥에서 다루어질 수밖에 없던간에 차이는 앞으로 철학적 사유가 적극적으로 해명해 나가야 할 개념이다. 차이는 이전에 해방적 사유 속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못했으며, 차이는 해방적 사유가 앞으로 개념화해 들어가야 할 새로운 공간을 열어 놓았다.


(2)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인간 평등을 추구하는 노예해방의 철학적 원리이다. 들뢰즈는 주노변증법이 노예해방의 원리를 충분히 개념화하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주노 변증법의 상호인정은 인격들 간의 대등한 상호존중을 논하고 있으나, 이는 단지 반응적 힘의 보편화에 불과하다. 진정한 노예 해방은 인격들간의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상호 대등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개인들의 적극적 힘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것을 인정하는 적극적 인정이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인 수준으로 나아가 맑스의 사회주의론에서도 계급해방은 계급철폐란 소극적이고 형식적인 해방만이 주로 사유되었지, 계급철폐 다음으로 계급지배로부터 해방된 개인들의 적극적인 능동적 힘의 실현이 제대로 사유되지 않았다. 형식적 평등주의에 머물러있었지, 이 형식적 평등주의의 기반위에서 개인들의 적극적 자기 실현의 실질적 평등주의가 사유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차이의 인정은 기존의 형식적 평등 개념으로부터 평등 개념을 한 단계 더 진전시킨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헤겔의 주노 변증법을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의 결론인 상호인정론 자체가 기각되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가 변증법에 대한 ‘지나친 원한감정’ 때문에 주노 변증법과 상호인정론 자체를 폐기하려 한다고 해도, 그의 차이의 인정은 주노 변증법과의 단절이 아니라, 계승적이고 연장적인 발전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들뢰즈의 차이의 인정도 상호인정의 새로운 내용 규정이지, 상호인정을 반대하는 인정론일 수 없다. 더욱이 차이의 인정은 헤겔의 상호인정론의 형식적 평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질적 평등은 형식적 평등을 전제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겔의 주노 변증법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는 들뢰즈의 차이의 인정론은 변증법과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될 수 없고, 상호인정론의 개념적 심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3) “철학의 가장 고귀한 물음”인 현존의 문제에 대해 니체는 만족할만한 해답을 찾았는가? 니체는 현존을 비하하는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아주 미세하고도 통렬하게 해부하고 있다. 니체는 현존을 비하하는 방식을 원한감정, 가책, 금욕적 이상으로 유형화하고 이에 따라 허무주의의 형태들을 구분한다. 유대교, 기독교, 소크라테스, 칸트, 변증법, 민주주의, 사회주의, 불교 등이 허무주의라고 해서 다 같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이 다양한 허무주의의 사상들이 각각 현존을 어떤 식으로 비하하고 있는지가 미세하게 분석된다. 현존을 비하하는 방식들은 미세하게 계보학적으로 해부되고 있다. 그렇다면 현존을 비하하는 방식들 이전에 현존 자체는 계보학적으로 해부될 대상이 아닌가?
니체에게 있어서 현존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현세적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현존은 니체에게 항상 고통이었다. 고통으로서의 현존, 이것이 니체에게 있어서 현존의 의미의 전부다. 그에게서 현존의 다른 의미는 찾을 수 없다. 고통으로서의 현존의 의미를 고정시켜놓고 니체는 이 현존을 비하하는 방식들에만 눈을 돌렸다. 그러나 현존을 비하하는 방식들 이전에 현존이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다. 구체적인 상황을 배제하고 현존을 논하는 것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이다. 히브리 노예들의 현존적 상황, 초대 기독교인들의 현존적 상황, 소크라테스,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의 현존적 상황이 다 달랐다. 그리고 현존적 상황의 차이가 현존을 비하하는 방식들을 다르게 나타나게 했다. 현존적 상황의 계보학적 분석의 부재가 현존의 문제에 대해 만족스런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게 하였다.

니체의 현존적 상황은 고통이었다. 그는 고통 아닌 현존을 체험하지 못했다. 그의 고통스런 현존적 상황이 그에게 있어서 ‘현존=고통’ 이란 현존의 의미로 고정되었다. 허무주의가 현존을 부정하려 한 근본적인 동기도 바로 현존이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현존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허무주의와 니체는 일치한다. 고통스런 현존을 어떻게 극복할 지에 있어서 니체는 허무주의와 다른 길로 나아가려 했다. 허무주의는 현존을 부정하는 길을 택했다. 니체는 현존을 긍정함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하려 했다. 그런데 그 허무주의의 극복이란 고통의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낑낑거리면서, ‘어, 나 하나도 안 무거워.’하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통스런 현존을 감내하는 것이 현존의 긍정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결국 니체적 긍정도 허위 긍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니체적 긍정은 현존의 고통을 어떻게든 감내해 보려는 처절한 절규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니체에게 있어서 현존이 고통인 한, 그가 자신이 극복하려고 했던 허무주의와 너무 가까이 있다.


허무주의도 아니고, 니체적 긍정도 아니라면 현존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것인가? 현존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다른 길은 현존의 의미 자체를 달리 모색하는 데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고통 말고 현존의 다른 의미는 없는 것인가? 현존이 즐거움과 환희일 수는 없는가? 현존이 즐거움이고, 그래서 현존을 긍정할 수 있다면, 이것만이 현존의 참된 긍정이다. 니체가 그러했듯이, 그리고 니체가 본 허무주의의 형태들이 그러했듯이 고통스런 현존이 현존한다. 그러나 니체가 체험하지 못한 즐거움으로서의 현존 또한 현존한다. 현존 안에는 고통스런 현존도 있지만 즐거운 현존도 포함되어 있다. 포이어바하에게는 현존이 즐거움이었다. 그의 유물론 속에서 기독교적 환상으로부터 해방된 육체는 현존의 긍정이었고, 자연은 육체가 향유할 대상이었다. 포이어바하가 초월적 무한성을 인간의 내재적 무한성으로 불러들였을 때, 그것은 현존에 즐거움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즐거움으로서의 현존으로부터 현존의 문제를 새로이 풀어나가는 일은 다른 자리에서 해야할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이 정도로 언급해 둘수밖에 없다. 즐거움으로서의 현존의 얘기를 꺼낸 것은 니체적 긍정이 참된 긍정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리고 니체가 실패한 현존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두기위해서이다. 고통스런 현존도 긍정해야 한다는 니체적 긍정은 현존의 부정성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철학의 가장 고귀한 물음”인 현존의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명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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