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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45년에서 1949년까지 백범 김구 선생의 어록을 수록한 책이다. 귀국에서부터 서거하실 때까지의 기자회견, 신문과 방송에 발표된 글들, 성명서, 담화문, 추도사, 대담, 편지 등을 시기별로 일목요연하게 엮어놓았다.
이 책의 특별한 점은 백범 김구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글들이 대부분 특정한 사건과 관련되어 씌어진 것이어서, 그가 무엇을 고민했고 어떤 방식으로 해결을 모색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해방 직후부터 6.25 전까지 극심하게 요동치던 국내외 상황을 개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도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이다.
그는 통일 없이는 완전한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반탁, 우파 협력, 좌우 합작 등의 선택 속에서 최선을 다해 민족의 미래를 헤쳐가고자 했다. 환국했을 때는 좌우 모두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나 곧이어 좌우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선생은 오랜 망명 생활과 본인 및 임시정부 각료들의 늦은 환국 등으로 국내 제반 사정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승만 등 모든 사람과 협력하고자 했지만, 두 사람의 길은 결국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박노자가 어느 책에선가 김구 선생을 극우파라 평가했는데 그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김구 선생의 문장은 간결하고 핵심이 분명하며 정직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뜨겁다. 민족적 문제 앞에선 언제나 신중하여 '모르는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원칙'이라고 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속에서 우리는 조국을 자신처럼 사랑했던 한 혁명가의 뜨거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정국 속에서도 선생은 혁명가는 영원히 낙관적이라고 말한다. 목적을 위해 끝까지 싸울 힘이 자신들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겨우 더덜곱난이나 아는 정도의 무식한 사람이나, 항상 청년들을 소중히 알고 사랑해왔다. ... 저 노골 김구가 우리 청년들을 토대로 지표로 신임하고 지금껏 싸워 왔구나 하는 생각 아래, 나를 지팡이 삼아 건국의 영웅이 되어 주기 바란다. (46년 좌파 청년과의 담화에서) 인류 역사에서 그 예를 찾기 힘든 왜적의 횡포한 학정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탄압 밑에서 단지 빈주먹밖에 가진 것이 없는 우리 한국 민족이 오히려 7~8개월이나 계속하여 총과 칼에 대항해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인류의 혁명사에 감히 가장 빛나는 부분이 되라라고 믿습니다. ... 3.1 운동의 위대한 의의는 실로 그 통일성에 있는 것입니다. 지역의 동서가 없었고, 계급의 상하가 없었고, 종교, 사상 모든 국한된 입장과 태도를 버리고 오로지 나라와 겨레의 독립과 자유를 찾자는 불덩어리와 같은 일념에서 이 운동을 일관했다는 점을 우리는 세상에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 3.1운동을 통하여 임시정부라는 영도적 기관을 탄생시켰고, 또 이 임시정부도 이역만리에서 가지가지 파란곡적을 겪으면서도 실로 이 3.1운동의 여러 선열들의 거룩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수난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는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 동포 앞에 거듭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46년 3.1절 경축사에서) 서울의 기온이 갑자기 영하 20도로 강하하는 혹한의 12월 10일 하오 4시, 석양이 비치는 운현궁 내의 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실에서 열린 국민회 중앙간부회의에 참석한 김구는 회의가 끝난 뒤 "이 외투는 작년에 본국에 돌아올 때 본국은 충칭보다 더 춥겠다고 해서 장제스 씨가 이별 선물로 준 것이오. 이제 전 국민이 독립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하고 돈이 필요할 때는 돈까지 내는데 나에게도 조국을 위하여 바칠 물건이 있는가 해서 찾아보았더니, 없어서 이 외투를 내놓는 것이오. 수많은 동포가 외투 없이 겨울을 넘기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떳떳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박사 형님을 수만 리 밖으로 외교 보내는 데 대하여 내 정성을 표하는 것이오"하고 입었던 감색 외투를 벗어 조성환 위원장에게 맡기었다. 건장하시다고는 하나 이 혹한에 칠순의 늙으신 몸으로 단 한 벌밖에 가지지 않은 외투를 조국의 독립을 위하시고 헐벗은 동포를 생각하여 벗으시는 정경에 대하여, 도 위원장을 비롯해서 일당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감명받았다. (46년 신문 기사에서) 서대문감옥에서 어느 청년이 내게 와 인사를 하는데, 나는 처음으로 이름만 듣던 청년이던 김좌진 당신을 만났소. 나는 그때 나이 사십에 17년 중역이었고, 당신은 5년의 형을 받았기에 당신이 먼저 나가서 일을 하겠다고, 밥을 먹을 때마다 내게 와서 둘이서 소곤거렸지요. 그 후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 (47년 김좌진 장군 추도사에서) 자신이 살아갈 길을 모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민족이 다시 사는 설계도를 꾸미기 전에 먼저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자기 자신에게 반문해 보면 스스로 뚜렷이 다시 사는 길이 보일 것이다. "조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40년 동안의 쓰라린 경험을 다시 되풀이하더라도 눈앞의 조그마한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고 타협해야 할 것인가." "누구를 위한 독립이요, 누구를 위한 정치투쟁인가. 민족의 내일 운명이 어찌되었든, 내 당파만의 득세를 꾀하고 개인의 불순한 영예를 위하여 사리사욕을 만족시키고 정치욕을 만족시키는 길로 달음질쳐도 옳을 것인가?" ... 나는 이 평범한 명제를 조선 민족의 '마음의 건설'이라고 부르고 싶고 '민족성의 재건'이라고도 부르고 싶다. 독립을 왜 해야겠으며 왜 우리는 다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 쉽고도 어려운 마음의 건설로부터 우리의 첫걸음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왜적의 40년간의 학정은 실로 우리 민족에게 소름 끼칠 만큼 슬픈 선물을 남기고 갔으니, 아직도 이 선물은 우리 민족에게 깊이 뿌리박혀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그들의 비길 데 없는 간악함의 잔재는 홀로 우리 민족의 생활 형태나 언어 동작에 남아 있을뿐더러 마음속에까지 깊이깊이 뿌리박혀 있다. 내 나라가 왕성하고 내 민족이 번성하기 위하여 힘없고 약한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짓밟고 못살게 굴어도 좋다는 왜적의 만행과,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 무수히 찾아낼 수 있는 동족 간의 야비한 투쟁, 자기 당파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독립도 민중도 민족도 저버리고 허수아비같이 날뛰는 행동은, 과연 몇 보의 차이가 있을 것인가.(47년) 나는 이번에 마하트마 간디에게서도 배운 바가 있다. 그는 운명하는 순간에도 자기를 저격한 흉한을 용서하여 그의 손을 자기 이마에 대었다 한다. 내가 사형 언도를 당해본 일도 있고 저격을 당해 본 일도 있었지만, 당시 나는 원수를 용서할 용기가 없었다. 지금도 나는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현재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더불어 투쟁하는 것뿐이다. 조국이 이 육신을 요구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선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삼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살피고 내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깊이 생각하라. (48년) 이 박사가 도미하여 단정 운동을 전개하던 때만 하더라도 나는 공표만 안 했을 뿐잉고, 동지들에 대해서는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사태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역설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박사가 귀국하면 친히 만나서 그것을 만류하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성명서를 발표하고 보다 더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나 괴로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수백 정당이 난립하여 국정이 극도로 혼란한 가운데다가 나와 이 박사의 충돌을 표면화한다면 대내외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 명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박사의 애국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박사도 평생을 조국 해방을 위하여 바친 분이니, 일시적 착각으로 그릇된 길로 들어갔다 할지라도 친히 만나서 사리를 따지고 대의를 밝혀서 간절한 뜻으로 말한다면 잘 깨달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냐 사도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복잡하고 어려운 길일지라도 그것이 바른길이라면 그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요, 진실로 이것만이 사람의 도리인 것이니 여기에 있어서는 현실적이니 비현실적이니 하는 것은 전연 문제가 외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망명 생활을 30여 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 줄 알면서도 민족의 지상명령이므로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48년 신민일보 사장과의 대담에서) 혁명은 약한 힘으로써 강한 힘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이니 만큼 진로에 난관이 허다하다. 그러나 혁명자는 언제나 인류 사회의 정의와 철석같은 신념을 출현시키기 위하여 최후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계속 투쟁할 뿐이므로, 혁명자는 언제나 낙관적 태도와 환경에서 생활할 뿐이다. (48년) 소련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 해도 공산 독재 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소련이 아무리 우리의 우방이요 소련인과 친구 되기를 아무리 원할지라도, 소련과 소련 사람을 우리나라와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위하기는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 해도 독점자본주의의 발호로 인하여 무산자를 괴롭게 할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상품시장화하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 (49년 연두 소감에서) 항상 하는 말이지만 상하이에서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립될 때, 나의 자격을 잘 알기 때문에 나는 높은 자리를 굳이 사양하고 임시정부의 문지기나 청소부를 요구했다. 자격도 없는 자가 감당 없이 높은 자리에만 앉으려 하면 안 된다. 내가 젊었을 때 나의 실력을 테스트해 보기 위하여 일본 헌병 보조원 시험 문제를 얻어 가지고 남모르게 나 혼자 한 문제 한 문제 풀어보았다. 시험 치른 답안은 그만 낙제였다. 그 후 임시정부에서 임시정부 경무국장에 취임하라고 하기에 나는 부끄러웠다. 일본 헌병 보조원 시험에도 낙젯국을 먹은 자가 경무국장이라니, 우리 정부를 모독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강권하여 할 수 없어 취임했던 것이다. ... 여러 동지들은 실력도 없이 높은 자리를 다투지 말고, 먼저 자기의 실력을 헤아리고 낮은 일부터 충실히 하라. 그리하면 높은 자리를 제아무리 사양하더라도 결국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49년 쟁족운동 연설에서) 여러 동지들! 죽은 물고기는 물이 흐르는 대로 둥둥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산 물고기는 아무리 급류일지라도 자기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산 고기는 깊은 물도, 얕은 물도, 순한 물도, 격류의 억센 물결도, 여울진 종잇장 같은 물도 모로 누워서라도 거슬러 올라갑니다. 죽은 고기는 목적이 없습니다. 산 고기는 목적이 있습니다. 동지들이여! 목적이 없는 죽은 고기가 되렵니까, 목적이 있는 산 고기가 되렵니까? 황허 강 한복판에 우뚝 선 지주의 기백,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용감하게 이를 물리치는 풍모, 이러한 것이야말로 남자의 기상입니다. 이 기상, 이 기백을 가지고서야 이 나라의 일꾼이 될 것이니, 평소 학교에서 이 기상, 이 기백을 단련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물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죽은 고기가 되지 말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목적 있는 산 고기가 되기 바랍니다. (49년 청년 연설에서) 독립이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칠십 평생 서러움과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을 받아 온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 보다 죽는 일뿐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완전히 독립만 되면 나는 그 나라의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독립한 자기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 일찍이 어느 민족이나 종교, 학설, 혹은 정치적 경제적 이해의 충돌로 인하여 두 파 세 파로 갈라져서 피를 흘리며 싸우지 않은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뒤의 초목과 같이 뿌리와 가지를 서로 뻗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49년) 현재 인류가 불행한 근본적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만 발달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도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에게 이러한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가 있을 따름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실현되기를 원한다. ...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적 양식의 건립도 필요하고, 교육의 완비도 필요하고, 경제적 조건도 불가피하지만, 무엇보다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은 진실로 인권의 평등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자유라고 하는 것은 제멋대로 살자는 것은 아니다. 어느 일개인의 독재도 없고, 어느 한 계급의 독재도 없이, 백성이 정권의 노예가 되지 않고 만민이 정권을 향유할 수 있는 나라의 자유를 의미한다. (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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