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뜬금없이 이 책을 읽은 까닭은, 다른 사람의 해설집이 미덥지 않아서이다. 사춘기 시절에 잠깐 읽고는 대체 뭔 말이여... 하고 내 관심에서 멀어진 책인데, 들뢰즈 공부를 하면서 그의 철학이 니체 - 스피노자 - 들뢰즈 계보를 잇고 있어서 다시 접하게 되었다. 들뢰즈의 사상은 부분적으로는 내가 참고할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내 취항이 아니라는, 그래서 버리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그 고민을 하면서 다시 읽어본 것이 이 책이다.
결론은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지나친 '문학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작품이 비철학적 텍스트지만 철학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사상의 본질을 살피기 위해서는 문학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사회적, 철학적, 정치적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문학적 해석이란, 내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만 볼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문학적 텍스트로 간주할 때, 고병권의 해석은 크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을 철학적 텍스트로 사용한다면, 고병권은 세상을 바라보는 니체의 기본적인 관점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노예 도덕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가 그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는 '위버멘쉬'의 논리, 죄책감 없이 어떤 일을 적극적으로 행함의 논리는, 싸이코패스의 논리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귀족-천민의 구도가 신분이 아닌 문학적 은유임을 감안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백인우월주의나 나치즘에 이용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힘'에 의해 세상을 가르고 차별하는 개념으로 전유되기 십상이다.
니체의 '운명애(Amor fati)'는 참으로 매력적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강함'이 니체적인 심리적 강함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기독교식 약자에 대한 동정 즉 자선과 시혜적 태도는 분명 문제가 있지만,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우리가 지닐 수 있는 자비심과 연민은 인간의 고귀한 품성이 아닐까. 그것조차 초극하고 난 뒤에 남은 윤리는 과연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300x2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