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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에세이

운명이다 -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by 릴라~ 2011. 8. 28.

 

 

다시는 이같은 분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아마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다시는 이같은 분이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수없이 흐른다 해도... 시대가 다르고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달라진 세상, 달라진 시대에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살아갈 것이므로...

노무현 대통령. 그의 개성과 열정과 투쟁과 분노, 번득이는 통찰은 모두 그 시대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릴 때 겪은 지독한 가난, 그로 인해 학창 시절 겪은 열등감, 청년기의 좌절과 방황, 그것을 넘어서 인권 변호사와 민주화 투사, 훌륭한 정치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이 모든 드라마는 그의 환경과 성격과 시대와의 조합의 결과였다. 하여, 우리는 그와 같은 인물을 다시는 만나보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은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책과 공적/사적 기록을 토대로 그의 동지였던 유시민이 출생부터 죽음까지 재집필한 것이다. 일대기에 가깝다. 그분 생애의 굵직굵직한 사건들과 그 고비고비에서 마주친 생각들을 죽 읽을 수 있다. 다 읽고 나서 우리가 만나는 건.... 시대의 최전방에서 온몸으로 비바람을 맞으며 그 바람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갔던, 마지막 한 걸음조차 그러했던 한 남자의 일생이었다. 더러 실수도 있었으나 그 빈틈이 그로 하여금 더 고민하게 하고 더 나은 길을 모색하게 했다. 어떤 이는 '대통령 노무현'은 싫지만 '인간 노무현'은 좋아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둘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인간적 품성이, 그로 인한 선택이 그를 대통령 자리에까지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기적적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당시 한 해 60명 뽑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우연히 맡게 된 시국 관련 부림사건, 대학생들이 재판도 없이, 가족에게 연락조차 없이 수개월을 갇혀 고문당하며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 분노가 자신이 겪은 가난과 겹쳐지면서 이후 억울하고 한맺힌 사람들을 위해 몸을 던진다. 그의 실천이 보편적 가치에 대한 추구보다는 그가 직접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처럼 뜨거웠던 것 같다. 그 자신 지식인이었지만 다른 지식인들과 다른 종류의 불덩어리를 가슴에 품고 있었으니 그는 힘없는 이들이 겪은 울분과 서러움을 그 자신의 일부로 간직하고 있었다.

책의 앞 부분이 내용의 구체성 때문에 더 잘 읽힌다. 뒤로 갈수록 문장의 힘이 좀 약해지는 감이 있다. 유시민씨니까 쓸 수 있는 글이긴 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쓴 자서전을 읽지 못함이 너무 아쉬웠다. 그가 성공한 시민으로 노년을 보낼 수 있었다면 글이 더욱 힘이 있고, 그분 특유의 유머와 재치가 페이지마다 번득였을 것이므로. 아쉽고 또 아쉬웠다.

그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다.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하자 성공한 시민으로 남고 싶어했다. 조선조 600년 이래로 정권 교체는 없었다고, 존경했던 김구 선생을 비롯해서 훌륭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극적 최후를 맞았더라고, 신념을 지키면서 성공한 모델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발견한 인물이 링컨이었다. 링컨이 분열된 남과 북을 통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듯이, 우리 사회의 '통합'을 가로막는 지역주의와 분단, 약자의 희생을 토대로 한 경제개발의 논리, 정경유착, 언론권력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새 시대의 첫차가 되기에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 구조가 너무나 완강했다. 집에 생활비도 못 대면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절, 그는 자기 자녀에게라면 이같은 길을 가게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럴 수는 없다고, 그 전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가 자유를 준 검찰과 언론이 그에게 칼을 겨누고, 그가 이 민주화(?)된 세상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말 줄은... 그 어떤 난관도 다 이겨왔지만, 마지막 싸움은 그에게 '희망 없는 미래'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그것은 죽음과 동의어였다. 노무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유시민의 표현을 빌면, '그 자신 말고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사람'. 그가 그 혼자서 검찰/언론의 칼날을 맞고 있을 때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그 많던 교수/지식인/정치인들은 다 어디 가고, 시대의 짐을 홀로 지고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이 마을에서 나서 이 마을에서 죽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고 한 말 그대로. 그의 선택은 그대로 운명이었다. 그의 걸음 하나하나가 시대와의 대결이었으므로.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그 시대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운명처럼. 

'슬픔도 힘이 된다'. 유시민씨가 자주 했던 말이다. 가끔 그 말의 의미를 되묻게 된다. 슬픔도 힘이 될까. 500만명의 조문. 무수한 사람들이 흘린 눈물. 그의 죽음은 어쩌면 우리 세대가 성인으로서 목격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일지 모른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그 죽음의 증인이며 그 많은 우리가 공유한 슬픔은 힘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우리 함께 그 슬픔을 나누고자 하고 그 슬픔을 딛고 일어서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다.

평생에 걸친 헌신으로도 부족해 죽음조차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큰 화두로 남은 님. 재임 기간 그가 처한 대내외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나는 그가 최선을 다했을 뿐 아니라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대북특검, 이라크파병, FTA 등 재임 기간 논란을 불러왔던, 통치권자로서의 그가 내린 중요한 판단에 관해서도 그 자신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를 더 매혹하는 것은 그의 인간적 매력이다. 좌충우돌하고 때로 실수하면서도 다시금 자신을 세워 나아가는 한 인간의 모습. 열린 마음이란 확신이 없는 게 아니라 자기 신념에 충실하되 그것이 틀렸다는 판단이 들 때 과감히 수용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더 또렷해졌다. 내가 아는 한 그는 가장 열려 있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가장 신념에 찬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가 그 누구보다 행복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기쁨 없이 그 오랜 길을 걸을 수는 없으므로. 물론 그것은 범인이 느끼는 기쁨과는 다른 차원의 기쁨이다. 많은 이들이 변절하는 가운데, 머리 좋은 사람들이 수없이 명멸하는 가운데 그는 우직하게 역사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정치판을 떠나고자 했을 때도 세상이 늘 그를 다시 불러내었다. 그는 그 부름에 응답했고 역사의 물결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슬픔도 분노도 그것이 지극한 것일 때 마음의 빛이 된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슬픔과 분노를 더 큰 희망과 기쁨의 실천으로 바꾸어내면서 자기 몫의 운명을 남김없이 살았다.

그가 행한 실수와 시행착오가 없었다면 그는 더 모범적인 사람은 되었을지 몰라도 이처럼 소탈하고 따스하고 용감하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사람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그가 '완전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으로서 뿐 아니라 시민이자 인간으로서 그 삶이 우리 모두에게 영감을 주는 이유이다.

그분이 숙제로 남긴, 승리의 역사, 기쁨의 역사를 써나갈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운명이다노무현자서전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지은이 노무현재단 (돌베개,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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