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꽃을 피워내는 나무
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동시대라 해도 각자가 살아가는 세계가 너무 다르기에. 세상은 조각조각 다른 색색의 천을 붙여 만든 패치워크처럼 저마다 다른 수많은 삶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이어붙인 건 아닐까. 그 조각들은 서로 붙어 있지만 조화롭지 않으며 어떤 통일성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 모든 조각들이 모여 한 시대의 풍경을 이루지만 우리는 우리와 이어져 있는 다른 조각들을 미처 보지 못한다.
'소금꽃나무'의 저자 김진숙은 60년생이다. 내가 74년생이니 14년 차이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시차, 어찌 됐건 동시간대를 살아온 시간이 훨씬 많다. 그럼에도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숨을 한번 들이쉬고 가슴을 한번 쓸어내렸다. 이분이 온몸으로 통과해온 세월이, 그 젊음이, 너무 혹독해서이다. 요즘 십대들이 무섭다고들 하지만,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 받아들였던 그때 십대들이 훨씬 더 무섭다는 저자의 말은 그 시절이 어떠했는지 짐작케 한다.
열여덟에 시작한 공장 생활, 뼈빠지게 일해도 받는 쥐꼬리만한 돈과 비인간적 처우, 안전 장치가 부족해 수시로 사람이 죽어나가고, 사람 대접 받겠다고 시작한 투쟁이 불러온 투옥, 똥오줌을 그대로 뒤집어쓰며 살았던 회색 감옥 안의 생활. 처음으로 힘을 모아 투쟁에 성공했을 때의 환희. 영상보다도 글이 이렇게 힘이 있구나 했다. 너무 처절해서 오히려 눈물도 안 나올 것 같은, 그런 신산한 삶의 풍경을 그는 구체적이고 담담하게 그려낸다. 어쩌면 뼈저린 한으로, 눈물로, 상처로만 남을 이야기인데, 조금의 자기 연민도 없이. 이미 그 모든 경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낸, 자기 삶의 자리를 받아들인 이의 당당함이 이분한테 있었다.
그가 그렇게 두드려맞아가면서도 현장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내 삶의 자리가 그러한 공간이고 다른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머리 깎고 출가했을 것 같다. 그는 그곳 말고는 갈 곳이 없었고, 함께 험한 세월 겪어온 동료들을 결코 떠날 수 없었노라고 말하지만, 그곳을 끝까지 지켜낸 용기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우리들 대부분에겐 지금 있는 이 곳 말고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직장을 떠나지 않더라도 여행이나 취미, 여가로 잠깐잠깐의 초월이 언제든 가능하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다른 시공으로의 이동이 가능한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지금, 여기'가 전부라면, 그 어떤 초월의 가능성도 배제되어 있다면, 삶을 보는 시각은 굉장히 달라지지 않을까. '지금, 여기'에 매몰되거나, '지금, 여기'를 묵묵히 숙명처럼 받아들이거나, '지금, 여기'를 떠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길인 '죽음'을 택하거나, '지금, 여기'를 바꾸기 위해 끝까지 싸우게 될 것이다. 저자가 택한 길은 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길이었다. 아니, 다른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을 떠날 수 없는 어떤 절실함이 저자에게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 해도, 그곳을 떠날 수 없는 절실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떠남'은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큰 용기가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가장 손쉬운 문제해결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큰 용기로서의 '떠남'보다는 손쉬운 해결로서의 '떠남'에 더 익숙해 보인다. 진정으로 떠나야 할 것들-삶을 미세하게 지배하는 습관적 사고와 행동 방식-을 떠나지 못하고, 지켜야 할 것들을 쉽게 버리는 건 아닌지. '지금, 여기'에 좀 더 힘있게 들러붙어야 하는 건 아닌지. 진정 떠나야 할 것은 어떤 공간이나 장소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틀은 아닌지.
이분이 그 아픈 자리를 끝까지 떠나지 못했던 건 그가 지켜내고자 한 '가치' 때문이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그리고 지금 함께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지켜내고자 한 가치. 노동자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가치. 이 말은 내게 언제나 구호로 들렸을 뿐 진실한 울림으로 다가오진 못했다. 나는 그저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보편적 가치에 동의했을 뿐, 구체적으로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먹는 음식과 입는 옷, 우리가 쓰는 이 온갖 가지 도구들, 이것들을 만드는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 조합원이지만 가끔 집회에서 마주치는 명령성 언어는 내 감수성과 늘 충돌했고 그분들과 일정 정도 거리감을 느꼈다.
앞으로도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은 남아있겠지만, 그 작은 차이를 넘어 마음으로 크게 동의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노동자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의 삶을 통해, 그 삶에서 길어올린 지혜를 통해 내게 증명하고 전해준 '가치'이자 선물이다. 작업복 자락마다 피어났던 하얀 소금꽃, 그 소금꽃에 스며있는 아름다움과 슬픔과 모순과 희망을 읽어낼 줄 아는 힘이 내게도 깃들기를 바란다.
사족 1)
내 경우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노동자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다. 굳이 주인이 있다면 그 자리는 '자연'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이러한 포지션이 나로 하여금 누군가를 강력한 '주체'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에 거부감이 들게 한 건 아닌지. 인간에게 강한 주체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실천력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앞으로 내가 극복해야 할 성향인지 고수해도 괜찮은 것인지 되묻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던지게 하는 책이다.
사족 2)
저자가 과거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한데 뭉뚱그려 비난하는 점이 조금 거슬렸으나 그분들로선 그분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으므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만 대통령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기보다는(그가 모든 사안을 다 알 수는 없다) 국가 권력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한 것 같고 어떤 것을 이슈화하는 언론의 책무, 중요 사안이 중앙에까지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더 필요해 보였다(김여진씨의 역할이 참으로 컸다). 무언가를 알리기 위해 50미터 고공 크레인에 올라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문제가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임을 알리고 우리의 문제로서 의미를 설정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지식인/예술가라면, 아직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예술가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치의 영역이겠지만 문제를 설정하고 제기하는 것은 지식인/예술가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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