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의 학살'이라는 걸작이 단 한 사람이라도 스페인의 대의를 위해서 나서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만 그 그림은 우리가 결코 완전히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무엇을, 우리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못다 표현할 그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6)
작가란 세계와 특히 인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기를 선택한 사람인데, 그 목적은 이렇게 드러낸 대상 앞에서 그들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법전이라는 것이 있고 법은 성문화된 것이니까 아무도 법을 모른다고는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니 법을 어기는 것은 당신의 자유이지만, 어기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알고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기능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 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계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일단 언어의 세계에 끼여든 이상, 작가는 말할 줄 모르는 척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의미의 세계 속으로 들어서면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법이다. 설사 말들이 자유롭게 결합되게 내버려둔다 하더라도, 그 말들은 역시 문장을 만들 것이며, 문장 하나하나는 언어 활동 전체를 내포하고 세계 전체로 지향할 것이다. 침묵조차도 말과의 관련하에서 그 뜻이 규정된다. (33-34)
비평가는 생계가 어려운 족속이다. 그의 아내는 그를 제대로 존중해주지 않고 자식들은 아비의 은혜를 모르고 월말이 되면 돈이 떨어진다. 그러나 그는 늘 서재에 들어가서,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펼쳐볼 수가 있다. 그 책에는 약간 쾨쾨한 냄새가 나는데, 그가 '읽기'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야릇한 작업이 이제 시작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통령이다. 사자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제 육체를 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면에서 보면, 그것은 저승과의 접촉이다.
책은 이미 대상도 행위도 또 심지어 사상조차도 아니다. 그것은 죽은 자가 죽은 자들에 대해 쓴 것이니까 지상에서는 이미 제자리를 갖지 못하고, 우리와 직접 상관있는 이야기는 할 수가 없다. 그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것은 내려앉아 무너져버리고, 곰팡 난 종이 위에 뿌려진 잉크 자국만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비평가가 그 잉크 자국을 되살려서 다시 문자와 말로 만든다 해도, 그것이 이야기하는 것은 비평가 자신도 실감하지 못하는 정념이며 대상 없는 분노이며 이미 사멸한 두려움이나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구체성을 상실한 세계인데, 그 세계에서는 인간의 감정은 이미 호소력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모범적인 감정의 차원으로, 요컨대 이른바 '가치'의 차원으로 옮아가 버리는 것이다. (39-40)
그러나 우리에게는 글쓰기란 하나의 기도이다. 작가는 죽기에 앞서 살아있는 인간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우리의 정당성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먼 훗날 우리가 과오를 저질렀다는 판정이 내린다 해도 미리부터 과오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악덕과 약점을 전면에 내세우는 그런 비루한 수동적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결연한 의지와 선택과 저마다 삶을 추구하는 전체적 기도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4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