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시작된 지 약 두 달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 때쯤이면 학급이 서서히 안정을 찾아야 하는데, 그 해는 유독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새로 만난 아이들과는 아직 대면대면했고 우리 반 교실이 마치 남의 집 같아서 교실에 들어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뭔가 탈출구가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재미난 계획이 떠올랐다. 일주일만 다른 반과 담임을 바꿔보는 것이었다.
2학년 열 반의 담임 선생님들 중에서 내 나이 또래의 체육 선생님인 1반 선생님한테 넌지시 말해보았다. 역시 같은 세대는 무언가 통하는 게 있다. 선생님은 흔쾌히 찬성했다. 말대답을 잘하는 드센 우리 반 아이들이 그 선생님 앞에서 어떻게 변할 지 기대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날 교실을 바꾸어 들어갔다. 체육 선생님은 우리 반 교탁 앞에 서서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일장연설을 했다. 우리 반이 너무 시끄럽고 질서가 안 잡혀서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자기가 담임을 맡기로 했다고.
그리고 조례가 끝나고 쉬는 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우리 반이 한 마디로 난리가 난 거였다. 우리 반 교실은 4층 복도 맨끝에 있었고, 1반은 바로 그 아래인 3층에 있었다. '우당탕탕' 계단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가장 말썽쟁이 두 녀석이 종이 치자마자 1반 교실 앞으로 달려와 머리를 쑥 내밀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생님, 진짜 담임 바뀌었어요? 저 이제 어떡해요? 이제 머리 잘라야 해요?"
당시 나는 아이들의 두발에 대해서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지금은 두발 규제가 사라졌다). 중학생은 머리 정도는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교실에서 내가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일은 없을 테니, 학생부에 불려가지 않도록 스스로 관리하면 좋겠다고 학기초에 말해 두었었다. 그 두 녀석은 다른 학생들보다 아주 조금 더 긴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슬쩍 눈감아주고 있었다. 이 두 녀석은 매우 일찍 등교했기에 아침에 교문에서 잡히는 일은 없었다. 내가 정말로 담임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하자 그 두 녀석은 아주 낭패라는 표정을 짓더니 풀이 죽어서 4층으로 올라갔다.
1반 체육 선생님은 사실 좋은 분이었다. 하지만 덩치 있는 남자 선생님에다 과목이 체육이니 학생들이 확실히 위압감을 느꼈던 것 같다. 1반이 늘 쥐 죽은 듯 조용한 것만 보아도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반 여학생들은 앞으로 이 일을 어떡하면 좋냐고 다들 울상이라고 했다. 나는 평소에 그다지 친밀감을 보이지 않던 아이들이 갑자기 나를 찾기 시작하자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잃어버렸던 존재감을 갑자기 되찾게 되었다고나 할까.
1반에서는 우리 반과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다. 담임이 바뀌어도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남학생들은 별 관심이 없었고 전교에서 제일 순한 1반 여학생들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마저 감돌았다. 아이들은 아무 동요 없이 평화로운 오전을 보냈다. 그리고 점심 시간이 되자 더할 나위 없이 온유한 표정으로 삼삼오오 모여 내게 외출증을 끊으러 왔다. 체육 선생님이 담임일 때는 무서워서 외출증을 잘 끊으러 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 발걸음은 오후에도 이어졌다. 쉬는 시간에도 각자 필요한 볼일을 보러 사부작사부작 교무실을 들락거렸다. 나는 그 얌전한 여학생들에 얼굴에 감돌던 평화로운 기운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은 아주 안정감 있게 하루를 보냈다. 우리 담임 선생님 돌려달라는 소리는 없었다. 오히려 풋풋한 행복의 기운까지 감지되었다.
다른 선생님들도 재미있어 했다. 평화로운 1반과 울상인 4반. 일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계속 이러다가는 자기 아이들의 변신에 체육 선생님이 너무 섭섭해하실 것 같았다. 그래서 일주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사흘 만에 담임 바꾸기를 철회했다. 고요한 1반을 떠나 드센 우리 반으로 돌아가기가 싫었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교실에 가서 말했다. 그 동안 잘 지냈냐고. 지루한 학교 생활 중에 학생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자 선생님들끼리 한번 장난을 쳐 본 것이라고.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쌤, 너무해요.”
아이들은 볼멘소리를 질러대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시냐고, 일 년 생활이 암흑으로 다가왔었노라고. 머리 긴 두 녀석이 제일 살 판 났다는 표정이었다. 늘 약간 삐딱한 말투로 툴툴거리던 농땡이들이었는데, 그래도 애들인지라 학교에선 담임 교사에게 심리적으로 기대며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언제나 조금쯤 어수선하면서 하나로 똘똘 잘 뭉쳐지지 않던 마흔 명의 우리 반 교실은 2학기에 접어들어 분위기가 싹 달라졌다. 자기 목소리만 키우던 학생들이 잠잠해지고 전체적으로 온화해지고 협동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내 리더십이 힘을 발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변화의 계기는 2학기 때 전학 온 한 여학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만화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이름을 가진 박초희.
초희는 복학생이었다. 미국에 6개월 연수를 갔다 오는 바람에 3학년 진급을 못하고 다시 2학년에 배정되어 우리 반 아이들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복학 전에 초희의 학교 생활은 그다지 모범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교장 선생님이 학급 분위기를 염려하여 초희를 우리 반이 아닌, 나보다 경력이 훨씬 많고 학생들을 한 손에 좍 잡고 계시던 선생님이 담임인 10반에 배정하는 것이 어떠냐고 한 걸 보면 말이다. 나도 좋다고 동의했는데, 중간에 일이 어찌되었는지, 초희는 그냥 원칙대로 우리 반에 배정되었다.
그런데 우리 반이 아~주 힘들어질 거라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복학생 초희가 오고부터 우리 반의 삐딱하던 남학생들과 여타 조무래기들은 완전히 평정되고 말았다. 초희가 딱히 대장 노릇을 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도 분위기가 스르르 바뀌었고 어느덧 학급은 안정을 찾았다. 아이들 서로간의 관계는 이처럼 역동적인 데가 있다. 한 명이 들어오면 때로 모든 것이 바뀐다.
또래보다 키가 큰 초희는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자기 세계에 몰두해있곤 했다. 수업에 잘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업을 방해하는 것도 아니었고, 태도가 유순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교사에게 반항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치마가 좀 짧고 머리가 좀 길고 누가 뭐라 하던 꿋꿋하게 자기 스타일을 고수할 뿐이었다.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초희에 대한 불만이 간간이 나오곤 했지만 나는 그 아이와 지내는 것이 괜찮았다.
초희는 그렇게 2학년 2학기 반년을 우리와 같이 지내다가 학년말에 이사를 가서 다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학교에 온 날, 초희는 내 손에 편지 한 장을 꼭 쥐어주고 갔다. 씩씩하고 터프한 여학생이 편지를 쓸 줄은 몰랐는데 편지는 애교 섞인 말로 가득했다.
“제가 맨날 선생님한테 장난치고 그랬던 거는 쌤이 너무 좋아서 그랬던 거예용. 저 때문에 교장 쌤이랑도 싸워주시고, 다른 쌤들이 다 욕해도 쌤은 제 편이었잖아요. 항상 얘기로 풀려고 하시고 이해시키려 하시는 선생님이 정말 좋아요. 제가 여기 다시 온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선생님 보고 싶을 거에용.”
초희는 고교 졸업 후 미국으로 가서 자신의 끼를 한껏 펼치며 신나게 살고 있다. 초희를 떠올리노라면 모든 아이들이 모범생이 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건강한 삶의 태도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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