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공고에 처음 왔을 때 무기력한 학생들의 모습에 많이 놀랐다. 오랫동안 교실에서 패배자였던 학생들에게 교실 수업을 통한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방향은 못 찾고 마음만 괴로울 즈음 ‘책쓰기 동아리’ 공문이 왔다. 지원금 백만 원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돈이면 학생들과 어디든 여행을 떠나는 것이 가능했다.
내가 이곳 학생들에게 경험하게 해주고 것은
처음엔 그저 여행이 목적이었다. 책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못했다. 책쓰기가 또 다른 선물이 될 줄은 그때까지는 생각 못했다. 다만 두 가지 방향만 정해 놓았다. 여행한 경험을 글로 쓸 것, 그리고 공동작을 만들 것. 개인 작업보다는 공동 작업이 작업의 힘겨움을 덜어주고 학생들의 마음을 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출발은 순조롭지 못했다. 반에서 가장 착하고 성실한 학생들로만 뽑았는데도 처음엔 몇 녀석이 모임을 들락날락했고 그 과정에서 탈락자도 나왔다. 7명이 시작했는데 인찬이는 방학 중에 한동안 연락이 안 되어 자동 탈락되었고, 가장 열심히 준비한 준표는 여행을 떠날 무렵 발에 난 사마귀를 제거하는 수술을 하는 바람에 결국 못 오게 되었다. 다른 녀석들도 썩 양호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만 더 빠지면 여행 못 간다는 엄포를 놓은 후에야 100% 출석률을 보였다.
각자 조사할 부분을 맡겼는데 그것도 산 넘어 산이었다. 모르면 물어보거나 해서 해결을 해야 하는데 이 녀석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빈손으로 나타나곤 했다. 나한테 대책 없다는 잔소리를 실컷 얻어들은 후에야 조금씩 조사가 진척되었다. 신기하게도 여행 직전 무렵에는 어찌어찌하여 우리 모두 지리산길 각 구간별 특징과 교통편, 자기가 생각하는 도보여행의 의미 등을 알게 되는 순간이 왔다.
학생들은 걸어서 하는 여행을 해보고 싶어했다. 희성이는 평소엔 차를 타며 잠만 잤다고 천천히 걸으면서 새로운 풍경을 보고 싶어했다. '힘들텐데?' 라는 나의 질문에 그래도 무언가 뿌듯함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병관이는 자연을 보고 싶어했다. 강진이는 친구들과 걸으면서 오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신기할 거라고 했다.
수민이는 생각은 있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아이였다. 다른 애들이 반쪽 적을 때 간신히 한두 줄을 적곤 했다. 몇 번을 거듭 물어서 이 길에 대한 그 아이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뭔가 변할 것 같다고 했다. 성실파인 세환이와 준표는 서로 잘하려고 경쟁했는데(우리 학교답지 않은) 다른 아이들은 별일 아는 일에 쟤들이 왜 경쟁하나 신기해했다.
8월 14일, 한 달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서부정류장에서 다섯 명이 출발할 때는 정말 감개무량했다. 대구에서 남원까지 2시간, 남원에서 둘레길이 시작되는 주천까진 버스로 금방이었다. 여름날이 덥긴 더웠다. 개미정지에서 구룡치까지 옛 사람들이 오일장을 보러다녔던 솔숲길은 그리 오르막이 심하지 않았는데도 애들에겐 많이 힘들었나보다. 고갯길인 구룡치가 끝났음을 알리는(반대 방향에서 오면 시작점임을 알리는) 푯말이 나오자 세환이가 큰 숨을 내쉬며 말한다. "구룡치 세 글자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고등학생이면 날아갈 듯 잘 걸을 줄 알았는데 평소 운동을 안 해서 그런지 아이들은 의외로 걷기를 힘들어했다. 가장 걸음이 처진 것은 '통통과'에 속하는 강진이였다.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구룡치가 끝나고 작은 내리막길이 나타나자 두 팔을 뻗으며 큰 소리로 외친다. "내리막길, 사랑합니다!!!" 같은 통통과지만 희성이는 잘 걸었다. 마른 몸매의 병관이와 수민이도 괜찮았다.
지리산 둘레길은 제주 올레만큼 예쁘진 않다. '아' 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 절경이 길마다 속속 숨어 있는 올레길에 비해 둘레길은 다소 밋밋한 편이다. 하지만 내륙을 관통하며 마을과 마을로 끝모르게 이어져 있는 이 길은 오래 묵은 술처럼 깊은 맛이 있다. 또한 긴 세월 한결 같이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우뚝한 지리산이 그곳에 있는 아주 작은 것 하나에도 위엄을 부여해 주었다.
‘길’을 믿었기에 떠날 수 있는 여행이었다. 길에서 내가 가장 열심히 한 것은 학생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일이었다. 혼자 걸을 때처럼 천천히 풍경을 음미하진 못했다. 그래도 좋은 것이 내가 인솔 교사가 아니라 함께 길을 걷는 동행이라는 사실이었다. 특별한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도 없고, 공부할 내용을 준비할 것도 없고, 그저 함께 걸으면 되는 길.
길이 우리의 스승이고 길이 우리에게 그가 전할 말을 들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사람 속으로, 우리 마음과 감각이 열려 있는 만큼 들어가면 되는 길. 길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강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조금씩 길을 닮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방향을 알려주는 푯말에 점점 민감해졌다. 주천~운봉 구간이 시작되는 첫 표지판 앞에선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산을 다 내려와 다음 여정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보자 서로 기념 사진을 찍겠다고 난리다. 이후로 한 마을 한 마을 지날 때마다 기념 촬영을 했다. 다음 마을까지 몇 킬로가 남았는지 계산해 가면서. 스스로 지도를 읽고 길을 찾았다.
구룡치를 내려와 회덕마을, 노치마을을 지나는 구간은 계속 뙤약볕이라 힘들었다. 아이들은 냇가가 나오면 달려가 발을 씼고 놀았다. 그러더니 희성이가 아예 맨발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른 녀석들도 따라했다. 물론 발이 아파서 오래 가진 못했다. 아이들은 그늘이 나오면 다들 주저앉아 쉬고 바람이 불어오면 두 팔을 벌려 맞고 메뚜기, 잠자리를 잡고 다시 날려보내며 그렇게 길을 걸었다.
여름은 도보여행하기 좋은 계절은 아니다. 무더위에 지치기 쉬운 데다가 폭우까지 겹치면 걸음이 힘들어진다. 내 경우도 여름엔 잘 걷지 않는 편인데 지리산길의 여름은 힘들지만 여름만의 멋이 또 있었다. 여름은 시각보다는 촉감으로 다가왔다. 걸을수록 우리는 알게 되었다. 힘겹게 고개를 넘은 뒤의 휴식이 얼마나 행복한지, 그때 마신 한 모금 물맛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지칠 때 다함께 부른 노래가 그 얼마나 힘이 되는지, 종일 걸어서 어둠이 깔리던 저녁에 민박집에 도착했을 때의 평화가 어떤 것인지도. 그늘 한 자락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고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에도 감사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그렇게 힘든 여정 중에 찾아왔다.
중간에 둘레길을 잠깐 벗어나 구룡폭포에 다녀오는 바람에 길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이 길이 언제 끝나나 슬슬 지쳐갈 무렵 덕산 저수지의 시원한 풍광이 나타났고 가장마을을 지나서 저녁 6시, 드디어 하루를 묵어갈 행정마을에 도착했다. 민박집 할머니가 차려주신 멋진 저녁 식사를 하고 다같이 모여 글을 쓰고 자유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이 마을을 산책하고 싶어했는데 믿을 수 있는 녀석들이라 허락해 주었다. 손전등을 들고 나간 아이들은 돌아와서 금새 곯아 떨어졌다.
다음 날, 행정마을에서 출발한 길은 2코스로 이어졌고 둑방길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아이들은 물수제비를 띄우며 람천에서 놀기도 하면서 인월까지의 여정을 무사히 마무리했다. 강진이는 지리산길이 '지옥길'이라고, 도보여행길을 너무 힘든 곳을 정해서 여행 다녀온 후 이틀 동안 다리가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고, 다시 가지 않겠다고 외쳤지만 가을에 또 함께 길을 나섰다.
10월 8일, 우리가 두 번째 도보여행을 떠났을 때는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서 인원이 5명에서 9명으로 늘었다. 대성이, 인찬이, 준표가 새로 합류했고 경북대 봉사활동 일정이 잡힌 민혁이는 밤에 과자를 한 박스 들고 민박집에 나타나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우리는 3구간을 금계에서 인월까지 반대 방향으로 걸었는데 시골 정취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길이었다. 날씨도 찬란했고 햇살을 받은 황금빛 다랭이논과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바라보는 지리산 봉우리들도 절경이었으며 하늘은 바다처럼 선명했다. 시골 정취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계절이었다. 여행자들도 여름보다 훨씬 많았다.
두번 째 도보여행에서 아이들은 한층 편안한 모습을 보였다. 두번 째로 참여한 아이들이 새로 온 아이들을 배려하면서 여행은 더욱 활기를 띠었고 아이들은 길을 즐겼다. 오르막길을 한참 가다가 갑자기 급한 내리막길이 나오니 다리에 힘이 풀려 힘들었는데 그 순간 희성이가 '여행을 떠나요' 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모두 다같이 노래를 목청껏 따라 불렀고 그렇게 노래하고 웃다보니 어느새 평지가 나타났다. 우리의 생명줄이던 김밥을 땅에 떨어뜨렸을 때는 땅에 묻고 엄숙하게 장사를 지내며 웃기도 했다.
저녁 햇살에 빛나는 억새와 여기저기 피어난 야생꽃들을 지나 매동마을 민박집에 도착하여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인월 마을에 다다랐을 때는 끝없이 핀 코스모스 길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드넓은 세상 속에 한 발을 내딛은 기분이었다.
길에서 만난 모든 것들에게 고마웠지만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사람들이었다. 도보여행을 하는 학생이 드물어서인지 가는 곳마다 우리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많은 분들이 가방을 열고 간식을 나누어주며 학생들에게 칭찬과 격려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식당에서는 공짜로 국밥을 두 그릇이나 더 주기도 했다. 세상이 우리에게 따뜻하게 다가왔고, 이 경험이야말로 나는 여행이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첫 여행에서는 낯선 이들에게 서먹서먹 말을 잘 꺼내지 못했던 학생들이 두 달 후 다시 떠난 여행에서는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특히 병관이는 사람들이 보이면 바로 인사를 건넸고 어른들은 학생들이 도보여행을 하는 것이 장하다며 너도 나도 덕담을 주었다. 내성적인 인찬이도 인사를 하기 시작했고, 두 번째 여행에서 아이들은 훨씬 자신감을 보였고 길의 주인이 되어갔다. 두 번의 여행이지만 아이들은 어느새 ‘스스로’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서로 머리를 맞대며 글을 쓴 시간도 여행 이상의 소중한 선물이다. 여행 후에 우리는 한 주에 하루 씩 한 달 정도 모여서 글과 사진을 정리했다. 쓰기를 워낙에 어려워하는 학생들인지라 단 몇 줄을 쓰기 위해 몇 시간씩 질문을 하고 대화를 나누곤 했다. 한 번 모이면 네다섯 시간은 족히 걸렸는데, 그 시간 학생들이 버텨낸 건 간식의 힘 때문일 것이다. 여행 시작 전에는 도보여행이 무엇일지 상상했고 끝나고 나서는 여행 중에 우리 마음을 움직인 것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시간의 간격을 두고 경험을 반추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학생들의 생각이 조금씩 자라고 그것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돌이켜보건대, 이 길에 특별한 게 있다면 그건 지리산 높은 고개도, 한여름 태양도, 가을숲의 아름다움도 아닌, 그 길을 느낄 수 있는 우리들의 마음이었다. 자연이 그 숱한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은 우리들 각자의 해맑은 가슴이었다. 이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종류의 인성교육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지점이었다.
두 번의 일박이일이 그렇게 끝났다. 이 소소한 여행의 씨앗이 자라고 자라서 이 아이들을 '삶'이라는 더 크고 위대한 여행으로 안내하는 힘이 되었으면 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여행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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