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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않는 여행 - 욱수골에서 숲에서 한 달쯤 생활하면 어떨까. 외로울까. 사람이 그리울까. 어떤 낯선 순간들을 맞이하게 될까. 무엇을 더 강렬하게 느끼고 무엇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될까. 숲 가운데 정자에 앉아 쉬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다가오는 어느 방학 때쯤 한번 떠나볼까 싶다. 지리산 자락 아래도 좋고, 강원도 좋고, 네팔 산자락이나 동남아의 작은 해변 마을도 좋을 것 같다. 최근 필리핀 팔라완의 포트바튼이라는 곳이 마음에 다가오고 있다. 먼 거리를 주파하는 여행도 좋지만, 요즘은 한 곳에 머무는 여행, 그런 것에 끌린다. 작년 봄, 함양에 갔을 때다. 버스 타고 가는데, 캠핑카 하나가 옆으로 지나갔다. 기사님이 그걸 가리키면서 외국애들 셋이 지난 겨울에 함양에 내려와서 세 달째 죽치고 논다.. 2009. 8. 11.
욱수골을 온종일 걷다 산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아쉽고, 걷기 코스라고 생각하면 만족스러운 길이다. 욱수골은 400미터 정도의 나즈막한 야산이지만 대구와 경북의 경계 지점이라 골이 매우 깊다. 겹겹의 산들이 끝모르게 이어진다. 그동안 나는 이 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잡목이 너무 많아서 어두컴컴하고 답답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청에서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근래에 산이 많이 좋아졌다. 나무들을 솎아내면서 숲이 훨씬 밝고 건강해졌다. 더 푸르러지고 싱싱해지고. 체육공원까지 가로등을 설치한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전체적으로는 숲도 좋아지고 등산로도 잘 정비되었다. 욱수체육공원에서 만보정, 욱수정 지나서 경산 성암산을 거쳐 덕원고교까지 약 여섯 시간 정도 걸은 것 같다. 큰 산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집 가까이 이렇게 길게, 종일 .. 2009. 8. 9.
효재처럼 살아요 - 이효재 효재처럼 살아요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이효재 (문학동네, 2009년) 상세보기  사진 반, 글 반인 책을 썩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은 예외다. 저자는 말을 안 한다기보다는 말을 아낀다. 몇 마디 말 속에 깊은 뜻이 배어 있다. 그 뜻은 그의 삶에서 우러나온다. 그래서 여운이 있다. 사진도 좋지만 문장이 더욱 좋다. 살림을 이렇게 예술적으로 할 수 있다는 걸 이 책을 읽고 알았다. 우리가 말로 남을 기죽이지 않으면 그 자체가 지구 평화다. '왜 그랬는데?'가 아니라 '그랬니? 어머, 잘했다' 진심으로 말해주는 것. (pp25) 세상의 잣대로 보면 나는 애 못 낳아, 남편은 집 나가, 일 많이 해 골병들어, 팔자가 세도 너무 세다. 그러나 나는 거꾸로 생각한다. 남편 집에 없고 아이 없기 때문에 생기.. 2009. 8. 7.
그대 가난함에 복이 있나니 - 쟝 바니에 그대 가난함에 복이 있나니 그대, 인습과 재물과 안락의 그릇된 세계에 갇혀 있지 않아라. 그대 온유함에 복이 있나니 그대, 폭력과 싸움을 거부하며 친절과 인내의 세계로 이끄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들였어라. 그대 진리를 목말라함에 복이 있나니 그대, 타협을 거절하였어라. 그대 자비로움에 복이 있나니 그대, 마음을 비참한 곳에 두었어라. 그대는 자비를 입을 것이며 아무도 그대의 죄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대 기도에 복이 있나니 언제나 그대, 평화의 도구가 되고자 원하매 무엇보다도 먼저 일치와 이해와 화해를 구하였어라. 그대 삶에 복이 있나니 그대, 스스로 양심을 키워 사람들이 하는 말에 흔들리지 않았어라. 박해를 기꺼이 안았어라. 진리를 선포함을 두려워하지 않았어라. - 쟝 바니에, 에서 2009. 8. 6.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 이득재 논의가 시원스러워서 금방 읽혔다. 저자가 비판하는 것은 가족이기주의가 아니라 가족주의 그 자체다. 그가 보기에 대한민국에는 '사회'가 없다. 시민단체는 있지만 시민이 없고 시민사회가 없다. 존재하는 건 가족과 국가뿐이다. 가(家)가 국(國)이 된 사회, 그래서 가국(家國)이다. 공공의 영역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 개인으로서의 혹은 노동자로서의 주체성이 없다. 거리의 모든 사람들은 엄마 아니면 아빠 아니면 학생/아이이다. 가족성원으로서의 존재감만이 우글거리는 사회이다. 그래서 노조가 시위할 때의 구호도 '아이가 울고 있다'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한 개인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모든 것을 가족이 담당하고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감당해야 할 짐이 지나치게 무겁다. 그래서 가족은 신.. 2009. 8. 6.
한여름에도 그리움은 깊고 - 봉하마을 대통령님 서거 이후 약 두 달만에 다시 봉하를 찾았다. 한 번 가야지 했는데,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분의 이름이 내게 상처였으므로. 슬픔은 허락받았지만, 죽음의 원인에 대한 사회적 논쟁은 이 사회에선 아직 '금기'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는 조금도 진보하지 못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 원인이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듯이. 우리는 권력과 맞서 싸워서 한 번도 이긴 역사가 없다고 생전에 노대통령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무수한 저항이 있었지만 혁명 세력이 권력을 쟁취한 역사는 없었다. 4/19도 6월 항쟁도 미완의 혁명이었다. 시민 권력이 탄생시킨 대통령, 그래서 참여정부는 참으로 값진 승리였다. 참여정부 5년 동안 조중동과 온국민의 쏟아지는 인신공격을 보면서 그 속에서도 흔들리지 .. 2009. 8. 1.
엄마, 내가 행복을 줄게 - 오소희 엄마 내가 행복을 줄게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오소희 (큰솔, 2008년) 상세보기 기차 안에서 보려고 고른 가벼운 책인데, 기대 이상이다. (여행작가인 저자가 쓴 다른 책들은 번역투 문장도 마음에 안 들고 내 취향이 아니었는데, 이 책은 괜찮았다.) 기찻간에서 금세 다 읽었지만, 읽고나서 마음 깊은 곳까지 따스해졌다. 학부모들을 만나다보면, 그 욕심과 이기주의에 진저리칠 때가 있다. 편안한 분들이 많지 않다. 아이의 현재는 사라지고 미래(자신의 틀로 바라본)에 사로잡혀 있다. 어머니가 아니라 '사업 경영자'의 마인드라고 할까. 아이가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더욱 가득하게 해줌을 잊어버린 것 같다. 아마 그분들이 처음 자신의 아이를 이 세상에서 만났을 때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모든 아이는 우.. 2009. 7. 3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 - 마이다 슈이치 "한 인간의 정신계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그가 선생을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 바로 그것이다. 그가 과연 진짜 사람을 만나느냐, 진짜 인격을 만나느냐, 그것이 요점이다." (pp10) 이현주 목사가 번역한 이 얇작한 책은, 저자인 마이다 슈이치가 자신의 스승 아케가라수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그래서 책 제목이 여시아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이다. 딱히 특별한 내용이 없는 이 책이 특별한 빛을 발하는 까닭은, 저자가 참된 스승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배움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참된 선생이 없다면 불교를 배우지 않는 게 더 좋을 것이다."(pp11) 그에게 불교는 추상적 개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한 인간을 만나는 것이었다. 저자는 열여덟살에 아케가라수를 만난.. 2009. 7. 29.
같음과 다름, 평범과 비범  한 달쯤 전인가, 지도교수님 및 동료들과 밥 먹다가 나온 이야기.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거였다. 물론 나는 이 정도면 지극히 평범하다고 주장했고....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다름'일 뿐이지, '비범'은 결코 아니다. 차이가 곧 비범인 것은 아니다. 같음과 다름이 수평적 차이라면, 평범과 비범은 수직적 차이가 아닐까. 내 기준으로는, 비범하지 않은 것은 다 평범한 것으로 간주된다. 내 사고방식이 아무리 타인과 다르다 하더라도(사실, 그다지 다르지도 않다. 그런데 다르게 여겨짐이 늘 신기하다) 나는 평범의 범위에 포함된다. 내게 그다지 비범한 점은 없기 때문이다. 비범함이란, 세상을 앞서가는, 세상의 흐름에 파장을 일으키는, 역사를 만드는, 그런 .. 2009. 7. 26.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직권상정에, 재투표, 대리투표까지, 초딩 반장 선거도 이렇진 않을 거다. 좋은 정책으로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을 생각을 해야지,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으므로 미디어법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밀어붙이는 딴나라당의 이 무능함=악랄함. 이제 질릴 법도 한 데 얘들의 파렴치는 끝이 없고, 계속 버전 업그레이드다. 그러고 나서 이젠 민생 살리기 한단다. 국민을 밥만 먹여주면 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도 우습지만, 얘들이 늘상 입에 달고 다니는 구호 '~살리기'는 '밥만 먹여주면 되지?' '밥 먹여줄테니 죽은 듯이 있어라' 뭐 이런 상징이 들어 있는 듯. 국가가 밥만 먹여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딴날당 지지 국민들도 우습고. '민', '민생' 이런 말에서는 국민이 풀처럼 약한 존재, 먹여살려야 하는, 돌봐야 하는.. 2009. 7. 23.
기적을 부르는 뇌 - 노먼 도이지 기적을 부르는 뇌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노먼 도이지 (지호, 2008년) 상세보기 45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을 단숨에 읽었다. 의학적인 설명을 사례와 더불어 스토리텔링하듯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뇌과학에 관한 최신의 연구 성과와 더불어 인간이라는 존재의 심연을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인간 존재를 뇌의 작동 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가소성'인데, 뇌의 '가소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뇌졸중으로 90퍼센트까지 뇌손상을 입은 환자들이나 선천적 장애를 지닌 사람들도 오랜 훈련을 거쳐서 뇌의 기능이 정상에 가깝게 회복된다. 인간의 뇌는 특정 영역이 특정 기능/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부분이 손상되.. 2009. 7. 22.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 / 정현경 아시아 여성신학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라 할 만하다. 유니온 신학대학 종신교수인 정현경의 박사논문을 번역한 책인데, 저자가 그 후에 이름을 현경으로 바꾸고 낸 책, , 등이 더 유명하지만 나는 이 책이 가장 마음에 든다. 저자의 문제의식이 집약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여성 신학은 그들의 ‘찢어진 몸’에서 시작된다. 고난이 그들 삶의 경험의 중심적 요소이다. 그들은 ‘민중 속의 민중’이며 ‘한맺힌 사람들 중에서 가장 한맺힌 사람들’이다. 아시아 여성들에게 필요한 하느님은 ‘고난 받는 종’으로의 예수, ‘주님’ 예수가 아니다. 아시아 여성들에게는 그들을 해방으로 이끄는 완전한 인간성의 상징 예수가 필요하다. 해방자/혁명가로서의 예수, 한을 풀어주는 어머니/여성/무당으로서의 예수, 일과 식탁에서 느끼.. 2009. 7. 19.
소리와 촉감 벌써 매미가 울기 시작한다. 우리 아파트엔 매미가 많다. 아직 절정이 아니라서 간간이 들리지만, 매미 소리가 한여름을 실감케 하고 있다. 그 소리 사이로 이삿짐 나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 모든 소리가 공간을 또렷이 울리는 건 공기 중에 습기가 많기 때문이다. 며칠째 비가 왔다 갔다 한다. 이미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어 그런지 시각적이기만 한 정보는 그다지 새롭지도, 쾌락적이지도 않다. 살아있음의 생생함을 불러일으키는 건, 소리, 그리고 시각과 냄새를 포함한 촉감이다. 아침나절, 내 귀를 뚫고 들어오는 숱한 소리들이 신선하다(방학해서 그런가). 약간 무거운 공기 질감도 좋다. 물론 햇살이 비칠 때의 가벼운 입자의 공기도 좋고. 화창한 날의 공기의 산뜻한 느낌은 내게 깊은 쾌락을 안겨 준다. 자연이 좋.. 2009. 7. 17.
푸코의 맑스 / 미셸 푸코 대담 내가 책을 쓰는 것은, 관심이 가는 주제에 대해 내가 무엇을 생각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책을 쓰는 동안, 그 책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바꿔 놓지요. 결과적으로, 각각의 새로운 작업은 내가 그 전의 작업으로 도달한 생각들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이론가라기보다는 실험가입니다. 나는 다양한 연구 분야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연역적인 체계를 발전시키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씁니다. (pp31) 현상학자들의 경험은 기본적으로 "생활 경험"이라는 어떤 대상을 가지는 매일의 일시적 형태 속에서 성찰적 응시를 통해 그것을 파악하려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지요. 반대로,.. 2009. 7. 14.
우석훈 선생의 특강 - 여전히 남는 아쉬움 저녁에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에서 마련한 4대강 사업 관련 정책포럼이 있었다. 연사가 우석훈 박사여서 책에 싸인이나 받을까 하고 간 자리였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1. 20세기 경제학의 동향을 설명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꽤 재미있게 들었는데 강단 학계의 이야기라서 그다지 와닿지 않은 분들도 있는 것 같다. 2. 그동안 우리 나라 경제 발전이 연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륙이 소외되었다는 점, 내륙에서 개발을 원하는 힘이 강하다는 점은 이해가 되었다. 이명박이 재벌들에게는 신자유주의를, 지역에는 토건주의(정부의 지나친 개입)를 편다는 것도 정확한 분석이었다. 3. 질문하신 분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 나라 많은 어르신들이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운하의 차이를(운하가 얼마나 비경제적인지를) 이해하지 .. 2009.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