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이야기/여행 단상89 박수기정 넘는 길 - 제주올레 9코스 제주 올레길의 매력은 아기자기한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 그 길 사이사이에서 만나는 산과 오름과 계곡, 그리고 그곳을 채우고 있는 바람, 파도, 바위, 갈대, 들꽃, 뭍 생명들이다. 지리산과 같은 장중함은 없지만, 화산섬이라 그런지 작은 섬 안에 다채로운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빈 해변이 이토록 아름답구나 하고 느낀 곳이 제주이다. 자연 그대로의 길이 아주 길지는 않다. 이 길이 30분만 계속되면 좋겠다 싶지만 야생적인 해변이나 숲길은 때로는 5분, 10분만에 끝이 난다. 그리고 인가와 사람들이 만든 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이것은 올레길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원시적인 자연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자연과 문화를 동시에 만나는 길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처음 걷기를 시작하는 분들에게.. 2009. 6. 10. 존재는 가슴으로 말한다 - 제주올레 8코스 자연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는다. 그것을 속에 담아두지 않는다. 흘려보내고 또 새로운 순간을 맞이한다. 비도 바람도 한겨울 추위도 자연의 피부에 흔적을 남길 뿐, 자연은 고통을 자기 안에 쌓아두지 않는다. 그들 존재의 중심은 언제나 변함없는 생명력일 뿐... 그들에게도 기억이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피부에 쌓이는 주름일 뿐... 우리의 모든 경험도 우리 피부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피부에 켜켜이 지층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발레리는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피부야말로 가장 깊은 것이다... 라고. 피부 아래엔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오직 있는 것은 그 모든 지층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슴이다. 하늘만큼 넓은 가슴, 빈 가슴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 우리 가슴은 언제나 .. 2009. 6. 8. 바람과 함께, 파도와 함께 - 제주올레 8코스 다시 존모살을 찾은 날은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도 세차게 일렁거렸다. 모래 카펫에 앉아서 파도 소리를 들었다. 해안으로는 파도가 쉼없이 밀려오고, 물결이 솟았다가 허물어지고, 구름이 움직이고, 햇살이 비치고, 바람이 춤을 추고, 지구가 한 바퀴 돌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별들이 움직이고... 내 몸속에도 파도가 밀려오고, 바람이 불고, 별들이 속삭이고.. 지구가 돌고... *걸은 날. 2009. 4. 25. 2009. 6. 6. 존모살을 마음에 남기고 - 제주올레 8코스 오후 1시 비행기여서 8코스 중반 무렵 올레길을 마무리해야 했다. 아침 나절, 중문 해수욕장 부근길을 빙빙 돌다가 마지막으로 만난 곳이 존모살이다. 주상절리 절벽, 하얀 백사장, 청정한 바다... 자연이 빚은 절정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 갑자기 나타난 낙원. 떠나기 전에 특별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올레길은 존모살을 지나 절벽 아랫길, 바닷가 바로 옆을 따라 나 있다. 파도와 절벽 사이를 지나는 길. 그 야생적인 길을 걸으며 얼마나 행복한지, 그 길이 너무 짧게 끝나서 얼마나 아쉬운지... 존모살의 비경을 마음에 담고 올레길을 떠났다. * 걸은 날. 2009. 3. 22. # 여행 팁 : 존모살은 제주 하이야트 호텔 산책로 끝에 나옵니다. 하이야트 호텔 테이크아웃 커피가 3300원인데 맛이 .. 2009. 5. 16. 세계와 나 - 제주올레 8코스 제주올레 8코스, 주상절리 직전의 빈 해변이 마음을 온통 사로잡다. 이 바닷가의 바위들은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 동안 여기 있었으리라. 그 숱한 바람과 파도 끝에 이렇게 부드럽고 둥글어졌다. 속은 단단하면서도 겉은 둥글다. 세계와 나의 관계. 나 역시 이 바윗돌의 하나. 이들보다 더 짧은 생을 살아가는 모래알 하나이다. 이름없는 모래알...... 나는 내가 이 세계 속의 작은 모래알이라는 것에 만족한다. 모래알은 세계를 그 안에 품고 있고 바다의 향취와 느낌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걸은 날. 2009. 3. 21. 2009. 5. 10. 어둠, 침묵, 신비에 잠겨드는 길 - 제주올레 8코스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너무 애썼구나.” 7~8년만에 나를 본 수녀님의 첫마디였다. 그 때가 벌써 지금으로부터 사오년 전. 당시 삶에 지치고 방향감 상실로 괴로운 나날을 보낼 즈음, 학창 시절 멘토셨던 마리아 수녀님을 뵈었다. 그 분의 이 한 마디가 마음에 남았고 그 후로도 문득 생각나곤 했다. 그 즈음 나는 내가 잃은 것이 충만한 관계와 사랑과 젊은 감각과 목적 의식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잃었던 것은 그보다 더 큰 것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삶에서 어둠이 사라졌고 그와 함께 신비도 사라졌다. 내 영혼의 어둠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닐 것이므로 다만 어둠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둠이 사라지면서 수용하는 능력, 신비, 직관, 예술 이런 것들도 함께.. 2009. 5. 10. 홀로 걷는 즐거움 - 제주올레 7코스 -> 외돌개 우리가 그 앞에 서면 마음이 온전히 열리고 우리 자신이 되는 그런 만남이 얼마나 있을까. 자기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나 아닌 다른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관계. 자연 속을 걸을 때 나는 그런 관계에 가장 근접하게 되는 것 같다. 소로우는 하루 4시간 이상 걷지 않고는 삶을 삶답게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뭐 철학자도 아니고 평범한 직딩에 불과한지라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홀로 걷는 시간을 삶에서 빼놓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종일 걷고 싶다. 그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삶의 한 형태이고 사람과 늘상 부대끼는 일을 하는 사람에겐 더욱 필요한 것.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 2009. 5. 2. 그대 마음 잿빛일 때는 - 제주올레 7코스 제주 올레 7코스는 외돌개의 청색 물빛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그 앞에서 마음이 꽃잎처럼 스르르 열리고 평온해지고 깊어지고 한결 부드러워지고 그러면서도 존재의 중심이 굳건해지는.. 그것이 자연이 지닌 힘 우리 영혼도 여기서는 푸름이 된다. 걸은 날. 2009. 3. 21. 2009. 4. 27. 눈길 밟으며 백록담 가는 길 - 한라산에서 제주의 날씨는 예측하기 어렵다. 일기예보는 우리가 여행하는 4박 5일 내내 흐릴 거라고 했는데, 간간이 햇살을 보았고, 한라산에 입산하는 날은 기막히게 청명한 날씨였다. (산행 시작 지점인 성판악으로 가면서 5. 16 도로를 지났다. 박정희의 쿠데타를 기념해서 만든 도로라고 한다. 이젠 이름을 바꿀 때도 된 듯.-.-; ) 2월 중순, 제주에는 이른 봄이 찾아왔지만 성판악에서 진달래밭 지나 백록담 가는 길은 초입을 제외하고는 눈이 그대로다. 어떤 길은 1m도 넘게 쌓여 있다. 눈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꽤나 지루했으리라. 하지만 이 날은 폭신폭신한 눈길을 밟으며 산을 오르는 기분이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었다. 한라산의 둥근 능선은 물론이고 백록담까지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 2009. 3. 30. 제주의 혼에 사로잡힌 남자 - 김영갑 갤러리에서 ⓒ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몇 년 전 이 책을 읽고부터 제주가, 더 정확히는 한 남자가 내 마음 한 켠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사진작가 김영갑. 이십대 후반에 제주에 왔다가 그 야생적인 자연에 반해서 이십년 동안 쉴 새 없이 제주의 오름과 들판과 안개와 바다를 찍었던 남자. 밥값이 없어 굶으면서도 필름을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던 남자. 가난 속에서도 매년 전시회를 개최했던 남자. 책에서 그가 유고처럼 펼쳐놓은 글과 사진들은 특별하다는 말만으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그의 삶의 정수였다. 제주의 원초적인 자연 속에서 그가 온몸으로 느낀 ‘삽시간의 황홀’이 글과 사진 속에 밀밀히 배어 있었다. 나는 한 남자의 열정, 고독, 예술혼, 자연에 대한 사랑 앞에 깊이 감동했다. 보기 드문 구도의 정신이었.. 2009. 2. 27. '한라산'을 가슴에 담다 - 성산일출봉과 우도에서 제주에 있으면서 성산항에서 이틀을 묵었다. 첫날은 올레 1코스를 걷고 나서. 둘째날은 우도를 보고 나서. 제주에서 가장 큰 바람을 맞았던 곳이지만 그곳의 고요한 정취와 밤의 적막함, 휘몰아치던 바람은 내 피부에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곳에서 성산일출봉 못지않게 많이 바라본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한라산이다. 제주의 중심부에 자리한 한라산은 날이 맑으면 제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지만, 장소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 사뭇 다르다. 제주도가 지금은 개발로 많이 망가졌지만 (특히 요 몇 년 새 길에다 돈을 쳐발라서-.-;, 관통도로로 섬 곳곳을 헤집어놓았을 뿐 아니라 해안 일주 도로는 거의 고속도로 수준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성산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의 풍모는 신비로웠다.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있어서.. 2009. 2. 25. 말미오름에서 바라본 성산포의 절경 - 제주올레 1코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 다비드 르 브르통 걸어서 만나는 세상에 중독되고 나면 차나 기차 등 탈 것에 앉아서 스쳐가며 바라본 그 어떤 풍경도 우리 마음에 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두 발로 걸을 때, 비로소 세계의 풍경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고, 우리 역시 그 세계의 일부가 된다. 두 발로 걷는 순간, 다리와 팔과 눈과 귀와 피부가 활동하기 시작하고, 무수히 많은 입자들이 살 속으로 파고 들어온다. 피상적이던 우리의 존재감이 커지고 우리는 이 세계 안에 튼튼하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세계를 느끼기를 원한다. 2월 15일, 제주 올레 1코스를 걸었다. 제주 여행은 세 번째지만 그 속살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대지와 바다를.. 2009. 2. 23. 강원도 산골의 작은 낙원 - 화천 다목리 감성마을 & 김유정 문학촌 11월 마지막 주, 멀고 먼 화천 땅에서 이외수 선생을 만났다. 밤이면 한치 앞도 안보이는 강원도 깊디 깊은 산골에 자신만의 작은 낙원을 지어놓고 도시의 온갖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모월당의 모습. 그는 거인이었다. 매스컴에서 보던 모습보다 훨씬 꼿꼿하고 강건한 목소리와 자세를 지녔다. 강의 내용은 저서 '글쓰기의 공중부양'의 핵심적인 내용이었고, 그밖에 선생님의 삶의 원칙과 깨달음, 교육에 대한 견해, 당부 말씀 등이 이어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강원도 산골 분교에서 일할 때, 찬 겨울밤 무서운 혹한 속에서 꼿꼿이 겨울을 나는 나무들의 '숭고한' 모습을 보고 전율하셨다는 이야기. 다음 날 춘천의 김유정 문학촌에 들러 촌장님(전상국)을 만났다. 전상국 선생의 강의는 잘 차려진 밥상을 받는 것.. 2008. 12. 16. 5월에 내리는 눈 - 지리산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세속을 벗어날 수 있는 곳, 지리산. 몇 시간만 오르면 만나게 되는 다른 세상. 한신 계곡 지나 가파른 산길 끝에 도착하는 천국. 드넓은 평원과 겹겹이 늘어선 산자락이 깊은 평화를 주는 곳, 세석 대피소.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산에는 평일보다도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지리산 날씨는 그 날이 되어야 알 수 있다. 모처럼 주어진 연휴라서 택한 지리산행. 산에는 아직 철쭉이 다 지지 않았고 하늘은 흐렸지만 날씨는 온화했다. 힘겨운 걸음 끝에 닿은 세석대피소엔 열 몇 사람밖에 없다. 덕택에 대피소 2층 마루를 혼자 독차지하고, 별 다섯 개 호텔보다 더 편하고 넉넉하게 산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이틑날 새벽, 눈부신 빛살에 잠을 깨었다. 대피소 작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하얗게 빛.. 2008. 5. 20. 충북 화양동 계곡(화양구곡) 어제 화양동 계곡에 다녀왔다. 화양구곡 경치 중 9곡에서 2곡까지 보았다. 이 일대는 우암 송시열이 화양동 서원을 세운 곳으로 암서재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서원은 대원군 때 철폐 되었는데 괴산 군수가 복원을 하고 있었다. 복원을 안 하는 것이 더 나을 뻔 했다. 서원 터에는(원래는 절터인데 유생들이 빼앗았다고 한다.) 웅장한 축대가 많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만 있더라면 더욱 고적한 분위기가 날 뻔 했 다. 새로 지은 서원은 유치한 느낌이 났으며, 전혀 멋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옛날에 명나라에 제사 지내던 만동묘까지 쓸 데 없이 복원해 놓았다. 우암은 정치에서 물러나 이곳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여기서도 조정에 간섭을 하며 정치를 했다고 한다. 화양서원 일대 70리 안에는 아무도 주막을 짓지 못하게 하고,.. 2005. 11. 28. 이전 1 2 3 4 5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