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영화, 드라마

말모이 ― 영화 '말모이'를 보고 '조선말 큰사전 머릿말(1947)'을 옮겨 적다

릴라~ 2019. 2. 26. 22:25

아프리카에서 돌아오자마자 영화 '말모이'를 보았다. 동성로 롯데시네마 한 곳에서 하고 있어서 마지막 날 다행히 볼 수 있었다. 시나리오는 좀 아쉬운 감이 있었다. 까막눈 판수(유해진)를 주인공으로 삼다보니 조선어학회 회원 한 명 한 명의 개성과 성격이 부각되기 어려운 스토리였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이 지닌 무게 때문이었을까. 영화를 보며 울컥 하는 순간이 많았고 엔딩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문법책은 1492년, 스페인 카스티야어 문법책이며, 세계 최초의 사전은 역시 스페인에서 1611년에 편찬된다. 이어 1612년에 이탈리아어 사전이 편찬되고, 이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가 사전 편찬을 위해 163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설립한다. 처음 담당자가 A에 해당하는 단어를 정리하는데 9개월이 걸리고 회원들이 그리 열정을 보이지 않자 다음 담당자에게 연금을 책정해주고 그는 I까지 작업하고 죽는다. 이후 사전 작업이 지지부진하자 회의 참석자에게만 배당금을 지불하기로 하고 이런저런 논란의 과정 끝에 프랑스어 사전은 1694년 60년만에 빛을 보게 된다. 사전 편찬은 이렇게 엄청난 시간과 품이 드는 작업이다. 

 

식민지 시대는 비극의 시대였지만 한편으로는 자각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제서야 우리말글의 중요성을 깨닫고 한글 연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선각자들은 1926년 가갸날(한글날)을 제정하고 사전 편찬과 문법 정리에 들어간다.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진행되던 사전 편찬 작업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물거품이 된다. 하지만 해방 후 사전 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어 사전 편찬 작업이 재개되고 1947년 조선말 큰사전 1권이 편찬되고 1957년 우리말 큰사전으로 이름이 바뀌어 6권이 완간된다. 

 

국가가 주도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사전 편찬도 60년이 걸렸는데, 식민지 시대, 그것도 지극히 열악한 재정 상황 속에서 사전 편찬 작업을 지속했고 이십 년 만에 해냈다는 것은 기적이라 말할 수 있다. 모국어에 대한 사랑과 민족 독립에 대한 위대한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식민지 시대 그 어떤 독립운동보다도 가치가 있는 독립운동이었다. 그분들의 열렬한 헌신이 있었기에 식민지 시대에 우리말의 기초가 정리될 수 있었고, 독립을 위해 꼭 해야 할 작업이기도 했다. 이는 해방 후 교육과 문화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남북한 언어가 어휘가 다른 부분이 있지만 기본적인 문법이 비슷하고 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는 이유도 식민지 시대 조선어학회가 문법의 기본 틀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학회 회원 중 3분의 1 정도는 북으로 나머지는 남으로 왔고 이분들이 기초를 닦았다. 조선어학회는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정해 놓았는데, 이는 북한에서 바로 실행된 반면 남한에서는 80년대에 와서야 이루어져서 좀 늦은 감이 있다.  

 

영화를 보고 조선말 큰사전 머릿말을 다시 읽어본다. "우리가 쓰는 낱낱의 말은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음어온 거룩한 보배이며,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물질적 재산의 총 목록이다." 사전 편찬의 감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명문을 읽으며 이 말들 하나하나를 모은 이들을 기억한다. 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한 조선어학회 회원들, 감옥에서 돌아가신 두 분 선생님, 학회의 작업을 도와 말을 모으는 일을 보탠 전국의 학생들, 조선어학회를 경제적으로 후원한 분들..... 

 

그 모든 분들의 숭고한 열정을 기억하는 이 순간만큼은 단 한 가지만을 소망하게 된다. 한국 사람들이 우리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쓸 때마다 이 쉽고 아름다운 말의 울림으로부터 표현의 기쁨과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는 자유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나는 아주 가끔 그런데, 더 자주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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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은 사람들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조선말은, 우리 겨레가 반만년 역사적 생활에서 문화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결과이다. 그 낱낱의 말은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 준 거룩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 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말은 조선 사람에게 너무 가깝고 너무 친한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조선 사람에게서 가장 멀어지고 설어지게 되었다. 우리들이 항상 힘써서 배우고 닦고 한 것은 다만 남의 말, 남의 글이요, 제 말과 제 글은 아주 무시하고 천대해 왔다. 날마다 뒤적거리는 것은 다만 한문의 자전과 문서뿐이요, 제 나라 말의 사전은 아예 필요조차 느끼지 아니하였다. 프랑스 사람이 와서 프랑스 말로써 조선어 사전을 만들고, 미국, 영국 사람이 와서는 각각 영어로써 조선어 사전을 만들고, 일본 사람이 와서는 일본 말로써 조선어 사전을 만들었으나 이것은 다 자기네의 필요를 위하여 만든 것이요, 우리의 소용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제 말의 사전을 가지지 못한 것은 문화 민족의 커다란 수치일 뿐 아니라, 민족 자체의 문화 향상을 꾀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아, 이 수치를 씻고자, 우리 문화 향상의 밑천을 장만하고자, 우리가 우리 손으로, 조선말 사전의 편찬 사업을 처음으로 계획한 것은 융희 4(서기 1919)년부터의 일이었으니, 당시 조선광문회에서 이 일을 착수하여, 수년 동안 재료 작성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정으로 인하여 아깝게도 열매를 맺지 못하였고, 십여 년 뒤에 계명구락부에서 다시 시작하였으나, 이 또한 중도에 그치고 말았었다.

 

  이 민족적 사업을 기어이 이루지 않고서는 아니 될 것을 깊이 각오한 우리 사회는, 이에 새로운 결의로써 기원 4261(서기 1928)년 한글날에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창립하였다. 처음에는 조선어학회와 조선어 사전 편찬회가 두 날개가 되어, 하나는 맞춤법, 표준말들의 기초공사를 맡고, 하나는 낱말을 모아 그 뜻을 밝히는 일을 힘써 오다가, 그 뒤에는 형편에 따라 조선어학회가 사전 편찬회의 사업을 넘겨 맡게 되었으니 이는 조선어학회가 특별한 재력과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까무러져 가는 사전 편찬회의 최후를 거저 앉아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과 뜨거운 정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포악한 왜정의 억압과 곤궁한 경제의 쪼들림 가운데서, 오직 구원한 민족적 정신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원대한 문화적 의욕에 부추긴 바 되어, 한 자루의 모지라진 붓으로 천만가지 곤란과 싸워 온 지 열다섯 해만에 만족하지 못한 원고를 인쇄에 붙이었더니 애닯도다. 험한 길은 갈수록 태산이라, 기어이 우리말과 글을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포악무도한 왜정은 그 해, 곧 기원 4275(서기 1942)년의 시월에, 편찬회와 어학회에 관계된 사람 삼십여 명을 검거하매, 사전 원고도 사람과 함께 흥원과 함흥으로 굴러다니며 감옥살이를 겪은 지 꼭 세 돌이나 되었었다

 

   그 간에 동지 두 분은 원통히도 옥중의 고혼으로 사라지고, 마지막의 공판을 받은 사람은 열두 사람이요, 끝까지 옥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섯 사람은 그 실낱같은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같이 바드러워, 오늘 꺼질까, 내일 사라질까 하던 차에 반갑다.

 

  조국 해방을 외치는 자유의 종소리가 굳게 닫힌 옥문을 깨뜨리어, 까물거리던 쇠잔한 목숨과 함께 흩어졌던 원고가 도로 살아남을 얻었으니, 이 어찌 한갓 조선어학회 동지들만의 기쁨이랴?

 

  서울에 돌아오자, 곧 감옥에서 헤어졌던 동지들이 다시 모여, 한편으로는 강습회를 차려 한글을 가르치며, 한편으로는 꺾이었던 붓자루를 다시 가다듬어 잡고, 흐트러진 원고를 그러모아, 깁고 보태어 가면서 다듬질하기 두 해만에, 이제 겨우 그 첫 권을 박아, 오백 한 돌인 한글날을 잡아, 천하에 펴내게 된 것이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다시 기움질을 받아야 할 곳이 많으매, 그 질적 완성은 먼 뒷날을 기다릴 밖에 없지마는 우선 이만한 것으로 하나는 써 조국 광복 문화 부흥에 분주한 우리 사회의 기대에 대답하며, 또 하나는 써 문화 민족의 체면을 세우는 첫 걸음을 삼고자 한다.

 

  돌아보건대, 스무 해 전에, 사전 편찬을 시작한 것은 조상의 끼친 문화재를 모아 보전하여, 저 일본의 포악한 동화정책에 소멸됨을 면하게 하여, 써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하던 일에 악운이 갈수록 짓궂어, 그 극적 기도조차 위태한 지경에 빠지기 몇 번이었던가? 이제 그 아홉 죽음에서, 한 삶을 얻고 보니, 때는 엄동설한이 지나간 봄철이요, 침침칠야가 밝아진 아침이라, 광명이 사방에 가득하고, 생명이 천지에 약동한다. 인제는 이 책이 다만 앞 사람의 유산을 찾는 도움이 됨에 그치지 아니하고, 나아가서는 민족 문화를 창조하고 활동의 이로운 연장이 되며, 또 그 창조된 문화재를 거두어들여, 앞으로 자꾸 충실해가는 보배로운 곳집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아니한다.

 

  끝으로, 이 사업 진행의 자세한 경과는 따로 밝히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다만 이 사업을 창조하며 후원하여 주신 여러분에게 삼가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바이다.

 

기원 4280(서기 1947) 한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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