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다큐

산 자여 따르라 | KBS 210226 ㅡ 백기완 선생 추모 다큐

릴라~ 2021. 3. 2. 21:49

그간 리영희 선생,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김대중 대통령 등 몇몇 분들이 돌아가실 때마다 한 시대가 지나가는구나 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로 한 시대가 완전히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기완 선생이 시대의 마침표를 찍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1987년의 백기완 선생을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생에서 막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선생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베토벤 머리를 닮은, 펄펄 휘날리는 머리는 그때도 여전했다. 대통령 후보로 나왔고 야권 단일화를 피를 토할 듯이 외쳤다. 당시의 정치 상황은 잘 알지 못했지만 진정성 있는 모습이랄까, 무언가 내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인물이었다. 

 

이후 백기완 선생의 모습을 언론에서는 잘 보지 못한 것 같다. 2002 월드컵 때 히딩크가 한국에서 만난 분들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인물로 백기완 선생을 이야기한 것을 어느 지면에서 읽었고 그렇게 드문드문 단편적으로 이름을 접한 게 다였다. 통일운동가라는 것, 재야에서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맹렬히 활동했다는 정도가 이분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부고를 듣고, 다큐를 챙겨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사회가 이분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죄송스런 마음이 컸다. 이런 분의 목소리에 주목하기보다는 하버드 석학 마이클 샌델의 책(정의란 무엇인가)이 훨씬 인기가 있다. 이 책이 별로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책보다 훨씬 가치 있는 자산을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데 아직도 경직된 진보/보수의 틀로 한 쪽에서는 백기완 선생 같은 분을 폄하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뜻이다. 이분의 삶은 그런 정치적 진영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분의 모든 주장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분의 삶이 범인의 것을 넘어선, 특별한 삶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했으면 좋겠다. 공동체가 제대로 존속하려면 그 정도 동의는 있어야 한다. 

 

다큐는 밤 11시 40분에 시작했다. 할려면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8시나 9시, 10시 정도에 하지 11시 40분이 뭐냐. 이건 뭐 안 하기는 뭣하니까 구색을 맞추려고 방영하는 모양새다. 다큐 장면에는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병환 중에 있을 때 촬영한 것이 많았는데, D가 보더니 "저거 뉴스타파에서 다 했던 거잖아?" 한다. 다큐가 끝날 때보니 뉴스타파 이름이 보인다. 뉴스타파가 촬영한 것들을 재편집한 모양이다. 

 

첫장면부터 강렬했다. 선생의 머리스타일이 왜 그런지 알게 되었다. 평생 한 번도 빗으로 머리를 빗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사내대장부가 대륙을 가로질러가고 해방싸움을 하는 판에 거울 보고 빗으로 머리를 빗으면 되냐고, 역사가 자기 거울이라고, 역사의 거울에 자기를 비춰봐야 한다고 하셨다. 선생의 삶 전체를 대변하는 말씀이었다. 

 

박정희 유신 때 감옥에 갇혀 엄청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고통이라 여기지 않고, 좋은 세상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통은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고, 영광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는 범인이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시대를 자기 것으로 껴안고 살아온 삶, 우리는 그런 사람을 '위인'이라고 부른다. 

 

선생은 어떻게 그런 너른 시야와 안목으로 평생을 살아오셨을까? 32년생인 선생은 일제시대를 직접 경험했고 분단의 아픔 또한 선생의 가족사를 관통하고 있다. 황해도 출신의 부친은 기자를 지낸 인텔리였고, 조부는 지역 유지였지만 독립군에게 자금을 댄 것이 발각되어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백기완 선생은 초등학교로 학업을 끝내게 된다. 해방 후 38선이 그어지면서 아버지와 형과 자신은 남쪽에, 어머니와 다른 형제는 북쪽에 남게 되었다. 가족을 만나려고 38선을 넘어가려다 매를 맞은 적도 있다. 형 백기현은 6.25 때 전사했는데, 전사하기 직전 편지가 왔다고 한다. 북쪽에 계신 어머니께 총을 겨눌 수 없어서 하늘을 향해 총을 쏘고 있다고. 선생에게 조국은 그의 가족이 하나이듯이 결코 둘로 나뉘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백기완 선생은 어릴 적에 백범 김구 선생을 직접 뵌 일이 있다. 김구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다. "기완아, 내가 분단을 거부하고 통일을 하자고 했더니 나보고 소련의 앞잡이라고 하는 놈들이 있더라. 또 한편으로는 나를 미국놈 앞잡이라고 그러더라. 나는 일생을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사람이야. 내가 어떻게 소련의 앞잡이고 미국의 앞잡이냐. 통일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싸움이 아니야. 통일은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던 양심이 하나가 되는 것이야." 아마도 이 말씀은 선생에게 큰 영향을 남긴 것 같다. 

 

식민지시대를 경험하고 백범 김구 선생을 직접 뵙고, 38선이 그어지는 것을 보고, 6.25 전쟁통에 형이 전사하고,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에 치열하게 맞서 싸우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이 왔어도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여전히 힘든 이들 곁에, 가장 낮은 곳에서 힘겹게 목소리를 내는 모든 이들 곁에 서고자 했던 사람. '거인'의 삶을 떠나보내면서 '뿌듯함'보다는 '아쉬움'이 드는 까닭은 이분들이 평생 외쳤던 것들이 아직 너무 많은 부분에서 '미완'으로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우리나라 정치와 언론이 왜 이 모양인가 늘 궁금했는데, 이 다큐를 보며 한 가지 실마리를 얻었다. 백기완 선생은 87년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때 민주세력이 단결하여 집권하는데 실패한 이후로 민주화세력은 역사를 주도해서 이끌어가는 권력이 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에서 눈물 젖은 노를 젓는 역할을 하는 세력이 되어버렸다고. 그 뿌리가 87년에 있었다. 정권은 두 번 바뀌었지만, 민주화 세력은 한 번도 역사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한 적이 없다고. 역사를 스스로 끌고가는 권력의 주체가 되어본 적은 없는 것이다. 국민의 힘을 비롯한 한 쪽 세력은 너무 비열하고 간악하고, 민주당을 비롯한 세력은 너무 나약하고 기회주의적이다. 다시 말하면, 민주화세력은 정권은 두 번 바꾸었찌만 한 번도 이 나라의 주류가 되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된 권력 교체를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백기완 선생은 시종일관 권력 바깥에서 평생을 일관되게 아스팔트에서 외치는 이들의 편에 섰지만, 나는 선생이 적어도 국회의원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차대전 후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가 정권을 잡았을 때 열심히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가톨릭 사제도 국회의원이 된 적이 있다. 지금 정의당에 경험이 일천한 젊은이 둘도 의원직을 맡고 있는데(20대 중에서도 똑똑한 애들이 많을 텐데, 왜 그처럼 자격이 부족한 이들을 20대의 대표자로 삼는지는 의문이지만), 백기완 선생이 비례대표 의원직을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선생에겐 늘 '민중의 대표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는데. 정치권에서 그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평생을 아스팔트 위에서 '재야의 목소리'로 살아온 백기완 선생에게 누군가는 늘 약자의 곁을 지킨 삶이라고 칭송하겠지만, 나는 그분이 권력을 쓸 수 있는 자리에 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노라면 욕을 먹기도 하고 여러 갈등에 부딪히겠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그래야 기회주의가 판을 치는 우리 사회의 '주류'가 조금씩 바뀌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다큐의 마지막 장면. 진짜 힘든 것은 (취업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청년들을 이 세상을 올바로 아름답게 꾸밀 주역으로 만들지 않고 썩어 문드러진 놈들이 만든 틀거리의 못이나 벽돌이 되라고 하는 것이라는 말씀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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