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올 사랑 | 정혜윤 _ 코로나 시대,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
흑사병이 전유럽을 휩쓸던 14세기,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을 쓴다. 유쾌하고 야한 사랑 이야기다. 그리고 2021년, 코로나가 전세계를 뒤덮은 이때, 정혜윤 작가는 보카치오처럼 '다시'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가 쓰는 사랑 이야기는 일반적인 사랑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이 자연과 세계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해야 할까, 우리의 변신을 촉구하는 사랑 이야기다. 사랑한다면 우리는 변해야 한다고, 많은 소설속 인물들과 현실속 인물들의 사랑을 예로 들며 인간의 변신을 이야기하는 책. 그래서 '앞으로 올 사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술술 재미나게 읽었지만 특히 인상 깊은 인물은 '레이첼 카슨'과 러시아의 식물학자 '바빌로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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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런 질문이 남는다. 우리의 사랑 이야기에 무엇이 빠져 있는가? 우리의 사랑에 무엇이 없어서는 안 되는가? 너를 위한 나의 변신이다. 나는 너를 위해 나를 바꿀 것이다!
이 어려운 것을 해내는 것이 사랑의 놀라운 힘이다.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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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연에게 위로를 구하지만 자연에게서 배우지는 못했다. 자연은 풍요로운 것이다. 우리도 세상을 풍요롭게 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레이첼 카슨은 생명 그 자체가 기적이란 것에 깊게 감동받았다. 사랑하는 것이 위험에 처했을 때 두려움 없이 용기를 냈다. 그녀는 과학과 양심을, 과학과 미래를, 과학과 사랑을, 과학과 용기를 결합시켰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 사랑은 손을 뻗는 것이고 팔을 벌려 안는 것이고 몸이 다가가는 것이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은 실천이고 행동이고 창조다.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것은 '침묵의 봄'을 쓰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의 생명을 구했다. 꿈이 현실을 구했다. 그녀는 일생에 걸쳐 자신의 사랑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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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열린 삶,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환상에 굴복할 사람들이 얼마나 남았을까? 우리는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있지 않은가? 삶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알약으로 견뎌내거나 그러지 않으면 혐오로 해결하지 않는가? 그렇게 서로 인간 가능성을 끝없이 축소하고 있지 않은가? 혐오는 좌절한 사람들이 만드는 역사다. 세상은 파괴되었다. 그렇다면 이 파괴된 위험한 세상에서 다들 어떻게 살아갈까?
우리 시대의 가장 많은 사람들이 택한 인간 가능성, 그것이 플로랑클로드의 말 속에 들어 있다. 바로 '순응'이다.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이 아니라 순응할 가능성을 살아간다. 순응이 이렇게 인간 가능성의 일부로 막강한 힘을 갖게 된 것은 현실과 관련되어서 설명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순응을 택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게 현실이야." 누군가 순응하지 않으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비현실적이야." 플로랑클로드는 처음에 유주와의 숨막히게 불행한 관계를 끝내지 못할 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너무 오랫동안 내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했고, 심지어 살아오는 동안 대부분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순응의 반대말은 주체성이다. 주체성은 사랑처럼 진지한 관심과 충실과 헌신, 책임을 필요로 한다. 사랑하는 그 무엇에 대한 진지한 관심, 충실, 헌신, 책임 없이는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은커녕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지 알 수 없고 자유롭기는커녕 불안정하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덜 주체적이 될수록, 더 순응할수록 더 안전하고, 더 얻을 것이 많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덜 순응할수록 살기 힘들다고 느껴지게 만든다. p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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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는 중요한 문제다. 나는 발견되는 기쁨을 말하고 싶다. 자기를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이다. 사랑받을 만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음이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이다. 건강한 자기애는 감사와 사랑을 보낼 타인들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좋지 않게 행동하면 슬퍼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 중 하나다.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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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동물과 인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수많은 바이러스들은 야생동물의 몸 안에 오랫동안 있어왔다. 우리 인간이 가까이 가지 않는 한 종간 전파를 일으킬 기회가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생태계를 교란시키면 위험은 점점 커져갈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이러스가 우리를 일부러 찾아오지는 않는다. 우리가 찾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인수공통감염병이 우리 책임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르고 아마존 같은 곳을 너무 많이 파괴했다. 그런데도 그동안 감염병의 대가는 다른 동물들이 치렀다. 니파 때는 돼지들이 사살되었다. 사스 때는 사향고향이가 끊는 물에 던져졌다. 코로나 때는 천산갑과 밍크가 죽었다. 조류독감, 구제역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감염병은 그동안 동물 몇 마리 죽이고 경제에 미칠 문제나 거론하는 정도의 사안이었다. 나는 이 사실이 가슴 아프다. 우리의 필생의 임무는 우리의 존재를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고, 코로나는 그 다른 존재에는 반드시 동물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나는 말 못하는 생명들을 위해 발언하고 싶었다. p21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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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함이 많은 포유류-인간으로서, 지독히 인간중심적으로 살아왔다. 세계를 다시 보기란 변화를 말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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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프의 동료들은 지하 저장실에 모였다. 그들은 추위에 떨면서 바빌로프라면 그들이 어떻게 하기를 바랐을까 상상해봤다. 그들은 바빌로프의 생사조차 몰랐지만 그래도 그라면 했을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종자를 한 톨도 빠짐없이 잘 지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식물학자들은 추위로 파랗게 질렸고 여위어갔지만 초를 켜고 큰 탁자에 모여 앉아 견과류, 씨앗, 쌀을 분류하고 기록하는 일을 계속했다. 식물학자들이 받는 배급은 빵 두 쪽으로 줄었지만 그들은 계속 일을 했다.
그동안에도 바빌로프는 살아있었다. 사라토프, 서른한 살에 처음 교수가 되어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이고 종자 보존지로 명성을 얻은 곳이기도 한 그곳 감옥에서, 그는 뼈만 남은 채 살아있었다. 감옥에서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음미할수록 가슴이 아린다. 쉰넷인 자신은 식물 육종 분야에서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고 그것을 조국을 위해 쓸 수 있다면 기쁠 것이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일하도록 허락해주시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는 답장을 받지 못했다. 인류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115회 원정을 다니면서 전 세계 다섯 대륙의 종자를 수집했던 유일한 과학자이자 탐험가였던 그는 서서히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연구소의 식물학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
바필로브의 동료 중 가장 헌신적이던 아홉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들은 끝내 자신이 돌보던 씨앗을 먹지 않았다.
컬렉션에서는 쌀 한 톨 사라지지 않았다. 책상에 앉은 채 죽은 그들 옆에는 땅콩, 귀리, 완두콩 표본들이 그대로 있었다. 아홉 사람의 사연 하나하나도 가슴 아프다. 문서 보관실을 지키다 굶어 죽은 사람, 경작지에 심으려던 땅콩 씨앗을 손에 쥔 채 죽은 사람...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종자은행의 유산은 씨앗과 그 씨앗들을 언제 어떻게 심어야 할지 알려주는 전통 농업 지식이었다.
종자를 지킨 바빌로프와 동료들은 굶어 죽었지만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 종자들에서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먹는 많은 음식이 나왔다. 이들의 이야기는 꼭 크리스마스 때 듣는 성인들의 이야기 같다. 성 바빌로프의 날. 자신의 생존 말고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나를 매료시킨다. 무엇이 그들이 숨을 거둔 순간만큼 진실하고 깨끗할 수 있겠는가? 먼 곳에서 온 그들의 이야기에 우리의 일용할 양식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밥 한 끼 벌기가 수월치 않아도, 우리는 그들을 찬양해야 한다. 먼 곳에서 우리에게 삶의 기회를 주었으므로. p275-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