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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와 선비 | 백승종 _ 선비들은 왜 그렇게 보수적이었을까

릴라~ 2021. 5. 13. 12:50


서양의 엘리트인 신사와 조선의 엘리트인 선비. 이 책은 이 두 집단을 비교하는 매우 참신한 시도를 합니다. 신사와 선비가 어떤 사회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되고 그들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펴보는 가운데 동서양 역사의 사뭇 다른 전개 과정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되는 책입니다.

중세의 기사 집단은 처음엔 조폭이나 다름 없었는데 자기 계급의 윤리를 획득하고 기사도 문학 등을 탄생시키면서 문화의 주역이 되어가고, 사라졌던 기사도가 사회역사적 요청에 의해 근세 서양에서 신사도로 부활합니다. 신사의 교양과 윤리를 내면화한, 젠트리로 대표되는 영국의 시민계급이 매우 평화적으로 왕의 권력을 축소시키고 자신들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은 매우 독특하면서도 흥미진진합니다. 이 과정에는 권력의 문제 뿐 아니라 인클루저 운동을 비롯한 농업 생산력 확대가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절대 권력을 타파하고자 했던 젠트리와 달리 조선의 선비들은 기존 체제를 끝까지 옹호하며 성리학적 세계관을 고수합니다. 서양의 계몽사상가들은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믿고 그렇기에 인간을 억압하는 절대 권력을 타파하고자 했던 반면에 조선의 선비들은 성선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이 타락하지 않도록 절제와 도덕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죠. 외부 세계와 활기차게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고립된 공간에서 내부를 쥐어짜는 전략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책은 선비들의 부정적인 측면 뿐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을 조명하는데 초점이 있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선비 집단이 더욱 매력 없게 다가왔어요. 그들은 왜 그렇게 보수적이었을까요. 선비들이 젠트리와 달리 기득권이어서가 아닐까요.


저자는 일본의 사무라이나 서양의 기사들이 주군과 같은 '사람'에게 충성한데 비해서 조선의 선비들은 왕명이라도 거역하며 자신의 '이념'을 따랐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그들이 내세운 '이념'이라는 것이 그다지 고상하지도, 진보적이지도, 변혁적이지도 않았으니까요. 위기 상황에서는 이념보다 신뢰하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의리'가 더 힘을 발휘하기고 합니다. 선비들에게 그런 의리가 부족해 보일 때도 많습니다.


물론 훌륭한 선비가 없지는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대표적이겠지요. 하지만 몇몇 선비의 인격적 고매함과 별개로 선비 집단은 제게 여전히 매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청나라로부터 서양 문물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18세기까지도 중국 고전을 흠숭하고 노동을 천시하고 백성들의 생활 세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기론, 주리론 논쟁을 비롯하여 예학까지 말 그대로 공리공론일 뿐이지요. 중화세계를 동경해서 18세기까지도 한문을 고수하고 조선인으로서의 '주체적 자각'이 매우 부족한 집단이었습니다.

 

백성들의 무지를 진심으로 염려했다면 한문을 고수할 이유가 없지요. 그 점에서 그들은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집단으로 여겨집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많은 선비들은 동학을 진압하는데 지원하죠. 전봉준을 고발한 임병찬은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그들의 시대 인식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꾼 농민들과 달리(물론 동학농민들도 조선왕조를 전복하려는 의지는 부족했지만) 선비들이 지키려한 나라는 조선이었겠지요. 


선비 정신을 이어가려고 하는 저자의 의도와는 반대로 책을 읽고 말았지만, 저자는 균형 잡힌 사관을 가진 매우 훌륭한 역사가입니다. 동서양 역사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국사를 조망하기에 편협하지 않으면서도 미래의 전망을 가지고 역사를 읽게 됩니다. 신간이 나오면 꼭 챙겨보는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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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회는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사회경제적으로 본질적인 변화를 겪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선비의 문학에도 변동의 폭이 별로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선비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성리학적 이념을 더욱 강화하면서 사회 변화를 적극적으로 저지하기도 했다. 서양의 기사들에게는 그처럼 막강한 힘과 기능이 부여된 적이 없었다.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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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구한말의 위정척사파에 해당했다. 그들은 유교적 세계관을 옹호했고, 서구 지향의 근대화를 끝까지 반대했다. 그런 점에서 양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였으므로, 무력투쟁을 통해 나라의 장래가 결정되었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여서 끊임없는 논리적 공방이 계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저들은 6개월간의 전쟁을 통해 장차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조선의 찬반양론에는 끝이 없었다. 어느 편이 더 나았을까. 대답하기 난처한 문제다. 그러나 어느 편이 더 효율적이었는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간명하다.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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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근대사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무엇일까. 시민사회의 성장일 것이다. 영국의 경우 시민과 젠트리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근대 초기부터 영국 사회의 주류는 항상 젠트리 또는 그 후손이었다. 그런데 18~19세기에는 사회적 주도권이 차츰 시민에게 이양되었다. 젠트리의 정체성은 갈수록 약화되고 시민의 정체성이 더욱 뚜렷이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시민사회가 되었다. 사회의 주도권이 시민에게 넘어갔다는 뜻이다. 중세 이후 서양 사회를 지배한 이들은, 기독교의 사제계급이거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귀족이었다. 그런데 시민사회란 이 같은 구시대의 지배계급이 아니라 시민, 곧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사회인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법학자 헨리 메인은 시민사회의 도래를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신분에서 계약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여, 신분의 의미가 퇴락했다는 주장이다. 메인은 이제 중요한 것은 계약이라고 말했다. 근대의 계몽주의자들은 사회 자체를 인간의 계약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이해했다.

부르주아지의 성장은 여러 가지 변화를 수반했다.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의 시대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쥬의가 새로운 지배 이념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성장에 밑거름이 된 것은 계몽사상이었다. 유럽 각 나라마다 내로라하는 계몽사상가들이 널리 존재했다. 그중에서 프랑스 백과전서파 인물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가령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시민을 계몽하기 위해 백과전서를 편집했는데, 그들은 원고를 직접 집필하기도 했따. 백과전서의 필자 가운데서 명성을 날린 이로는, 볼테르를 필두로 몽테스키외, 케네 및 루소 등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연구했으며 한 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평범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신선한 주장이었고, 시민들의 반응 역시 폭발적이었다. 그 핵심 메시지는 이러했다.


‘인간은 삶에 쾌락을 선사하는 선을 추구한다. 반면에 불행의 원천인 악을 피한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 고대의 철인 맹자의 성선설과도 유사하다. 조선 선비들의 심성론도 맥락이 일치한다.


그러나 동서양의 철인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선비들은 개인과 사회의 도덕심을 배양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도덕보다는 인간의 권리를 강조했다. 그들은 인간의 쾌락 또는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연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죽 인간은 누구나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바, 이것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천부의 권리라는 확신이었다. 선비들은 끝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는 더욱 놀라운 점이 있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 이상,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그들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인간은 자유방임을 통해서 더욱 완전한 행복에 도달한다"라고도 말했다.


선비들은 성선설을 강력히 주장하면서도 전혀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하지 않도록 더욱더 절제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인간이 사심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촉구했던 것이다. 조선 선비들의 입장에서 보면, 개인이 노골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상업에 종사한다면 그것은 죄악이었다. 하지만 서양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재부를 죄악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개인의 부를 함부로 비판하지도 않았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타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절대왕정이었다. 왜 그럴까. 절대왕정의 이름으로 인간의 본성을 해치는 비정상적 질서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절대군주들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유럽의 왕들은 기독교 교리를 들어가며 인간의 자연권을 부정했다. 그러므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절대왕정의 토대인 낡은 헌법을 개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과학과 산업의 발달을 고무적인 사회 변화로 받아들였다. 그 바탕 위에서 그들은 기득권층의 권력기반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의 사유재산권을 강화하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17세기 이후 조선과 중국에서도 낡은 제도를 개혁하자는 선비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왕정의 타파를 주장하지는 못했다. 선비들은 왕정 자체를 부정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정에 널리 퍼진 부정부패의 풍조를 제거하는 데 개혁의 초점을 맞추었다.


선비들은 서구의 계몽주의자들이 선호한 자유방임적 관점을 조금도 긍정하지 못했다. 재산권의 자유를 주장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재산권의 통제를 주문했다. 선비들은 보수적이었다. 그들은 기존의 사회 질서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나는 선비와 계몽주의 사상가들 가운데서 누가 옳았고, 누가 글렀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다. p10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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