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역사, 인물

강한 자에는 호랑이처럼 약한 자에는 비둘기처럼 | 김승태 외 엮음 _ 3.1운동의 목격자, 스코필드 박사의 기록

릴라~ 2021. 5. 15. 13:51


'스코필드'라는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게 된 것은 화성 제암리 3.1운동 유적지에서였습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일하던 중 3.1만세 운동을 목격하고, 만세 후에 일본군이 저지른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하고 서방 세계에 적극 알린 인물입니다. 구한말부터 식민지 시대까지 우리나라를 직접 여행하거나 방문한 이들의 기록을 개인적 호기심에서 찾아 읽고 있는데 스코필드 박사의 글을 모은 꽤 두툼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하여 반가운 마음에 읽었습니다.

3.1만세운동은 경술국치 후 약 10년 뒤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을사보호조약부터 치면 식민 통치가 15년쯤 될 무렵이지요. 조선왕조 패망 후 십여 년이 지났을 때 조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도로와 기차가 생기고 각종 신문물이 들어오지만 조선 민중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이 일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모든 분야에서 차별을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스코필드의 의견을 따르면 차별 그 자체보다 '민족동화정책'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의 이상과 염원을 천황 숭배를 비롯한 일본인들의 이상과 염원으로 바꾸는 것, 한국의 오랜 문화적 전통을 일본의 것으로 바꾸는 것, 일본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스코필드 박사는 말합니다. 일본의 동화정책(민족말살정책)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3.1운동은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조선 민중의 항거라고. 남녀노소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조선인들이 방방곡곡에서 외친 만세함성에 깃든 참뜻이 그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조선인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너무나 감동적이고 놀라웠다고. 그 경험이 강렬했는지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로 귀국한 후에도 시종일관 한국의 독립을 위해 글을 쓰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 수의학과에서 일하다가 국립현충원에 안장됩니다.

스코필드 박사의 기록을 통해서 3.1운동 당시 조선 민중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친 그 사건으로부터 대한민국 현대사가 시작되었다는 것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3.1운동을 주도한 것은 천도교 세력이고 천도교가 기독교를 끌어들이면서 저변이 넓어지죠. 천도교의 뿌리는 동학이니 구한말 동학으로부터 민족적 자각과 주체성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그 거대한 에너지가 근대사 100년을 이끌어왔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동학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정감록과 같은 비밀결사운동과 서학(천주교)이니, 성리학적 세계관이 붕괴되면서 우리 역사를 끌어온 원동력은 백성들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가장 큰 움직임은 동학이었고 동학에서 잉태된 천도교가 3.1만세운동을 이끌었고 기독교의 교육활동 또한 민중의 계몽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3.1만세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말합니다. 교육이 없었다면 만세운동은 일어날 수 없었을 거라고. 일제의 동화정책으로 우리말은 공교육에서 배척되지만, 천도교와 기독교, 대종교(주시경 선생이 대종교였죠)를 중심으로 근대에 들어서 우리말과 글을 통한 활발한 계몽운동은 민중의 자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외세가 들어오는 격변의 시기에 조선인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거죠. 천도교와 대종교는 만주를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의 주요 세력이기도 합니다.

3.1만세운동은 조선인이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천명한,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자각한 거지요.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이 흐릿할 때면 기원을 돌아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3.1운동은 민중이 '자각'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이자 영감의 원천입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해방 후 한국의 청년들에게 거듭 당부합니다.

"1919년 당시의 젊은이와 늙은이들에게 진 커다란 빚을 잊지 마시오."

그 조언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덧붙임) 스코필드 박사는 여러 글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의 혼란을 종식시킬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제정하기 전에 돌아가셔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쉬운 대목입니다. 3.1운동과 군사쿠데타는 양립하기 어려운 가치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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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백성에 대한 탄압과 반인륜적 범죄에 분노한 외국인이 불과 일 년 사이에 약 100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투고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자주독립을 한국 국민의 타고난 권리이며, 세계역사의 필연적 결과라고 설파하는 데 이르면 약관 30세 청년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역사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과 인도주의를 읽을 수 있다. p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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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본의 광범위한 학살 행위를 목격하면서 스코필드는 실로 분개하여 언론을 통하여 일본 정부에 잔학 행위를 중단하라고 요구하였고, 독립만세 현장과 4월 제암리와 수촌리에서 저질러진 학살의 현장을 사진과 글에 담아 국제사회에 고발하였다. 전국을 다니며 투옥된 독립지사들을 위로하는 등 일본 정부에는 호랑이, 한국인에게는 비둘기와 같은 인물이었다. 피바람으로 살벌했던 당시, 한국에 와 있던 약 170여 명의 외국인 선교사 가운데 나서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 사람은 오직 스코필드 한 사람밖에 없었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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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언변으로 가득한 그의 강의는 학생들의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강의실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그는 "학생들의 마음은 채워야 하는 그릇이 아니라 당겨야 하는 불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교육의 본질이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고 탐구심을 유발하여 스스로 공부하게 하는 데에 있다고 꿰뚫어 본 것이다.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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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기 하루 이틀 전날 밤에, 한 한국인이 나를 찾아와 품 안에 깊숙이 숨겨 두었던 그 유명한 '대한민국 독립선언서'를 꺼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내가 한국인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주 들어 알고 있었고, 언젠가 때가 무르익으면 자신들이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할 거라고 하는 말도 익히 들었다. 나는 그것이 헛된 꿈이라 생각했고, 한국인들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정신적인 용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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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같이 있던 한국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일본이 만들어 준 이 웅장한 시설과 여러 가지 개선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고맙지요. 그러나 두 가지 이유에서 일본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한국인들은 그 모든 변화에 있어서 처음에 약속되었던 것처럼 협조를 요청받은 적도 없고 그것이 허락된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둘째로, 이 모든 것들이 직접적으로는 일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한국의 이익은 부차적입니다." (...)

잘 닦인 좋은 길이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똑같이 유익한 길은 아니지 않은가? 그 모든 것은 몰수된 땅과 강제 노역에 의해 건설되지 않았던가? 철로 또한 일본과 한국에게 똑같이 필요한 시설이었다. 일본은 학교, 은행, 조림 사업 등도 필요로 했고, 동화정책 하에서 그것들을 추진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물었다. "그건 이기적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고방식 아닌가요?"

그가 대답했다. "다 훌륭한 시설이고, 우리도 그런 시설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으로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양측이 주고받는 파트너가 되길 기대했습니다.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한일합병조약 당시에 평등을 약속받았다는 것입니다. 도로, 철로, 학교, 은행, 전부 일본의 이익이 우리의 이익이라고 했고, 우리는 그런 시설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리 문제에 있어서 일본의 이익과 우리의 이익은 충돌했습니다. 교육부서, 일선학교, 통신부서, 철도사무국, 재무부, 은행 같은 기관에서 우리는 원하는 자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한국인은 일본인들이 약속한 동반 관계 안에서 그들의 형제자매가 되기는커녕, 나무나 베고 물이나 긷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항하는 것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의 이러한 생각을 일본이 알았더라면, 소요 사태에 없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한국의 사정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일본인 친구에게 거의 모든 한국 아이들이 어떤 특정인을 '나라를 팔아 먹은 놈'이라고 부른다는 걸 말해 주자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한국인들의 민심이 그런 식으로 과거의 역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한일합병조약을 기만적인 매국 행위로 간주한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는 또한 일반적인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1600만 한국인과 수백만 평방마일의 토지를 강탈해 간 엄청난 도둑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p8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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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에 의해 발표된 한국의 개혁이란 한국에 대한 최후통첩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한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의 함성에는 한 가지 분명한 뜻이 있었다. 그것은 민족 말살-동화정책-에 항의하는 국민의 반대의사였다. 일본은 이 함성에 분명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한국인에게 동화정책을 펴 나갈 것이다." 일본의 이런 대답은 어마어마한 실수였다. 한국인들은 빵을 요구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돌덩이를 받아왔다. 게다가 일본은 현 한국인의 정신을 절대적으로 무시했다. 한국의 민족정신이 최악으로 기울었던 10년 전에 실패한 동화정책이라면, 민족정신이 밀물처럼 거세게 발현하고 있는 이 시점에 같은 정책이 성공할 거라 기대하는가? 10년 전에 한국에서 일본의 문제는 조직화되지 않은 1600만 명의 반란자를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1700만 명의 조직화된 반란자들을 동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1000명 이상이 죽고, 1500명이 다쳤으며, 1만 3000명이 태형에 처해졌고, 2만 6000명이 구금되었고, 1700명이 집을 잃었고, 1700만 명이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 모든 것이 동화정책이란 끔찍한 악몽에서 도망치겠다는 희망을 가진 탓이었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한국이 순순히 받아들이고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일본의 물질적인 힘에 맞서 정신적인 힘을 모으고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본격적인 저항을 시작할 것인가? 새로운 한국을 밀접하게 알고 있는 사람만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P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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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동화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한국적인 이상과 염원을 일본의 이상과 염원으로 바꾸어야 한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문제의 핵심은 민족 차별이 아니라 일본의 동화정책이다. 일본이 이 정책을 고집하는 한, 개혁이나 칙서는 한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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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들이 편 정책들 중에서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학무국의 정책이었다. 교육과 동화란 나란히 존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어리석은 시도가 진행되었으며 당연히 실패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실패가 누구의 책임이라고 봐야 하는가? 모두가 군국주의자 하세가와 총독을 비난한다. 그는 은으로 된 화병 두 점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실각했다. 하지만 총독의 동화정책을 망친 장본인들은 아직 공직에 있다.

현재 한국에서 일어난 움직임을 주시해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들이 무지하고 교육받지 못했다면 소요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동화정책의 기본적인 조건은 바로 교육의 억압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국립학교는 해마다 수를 늘려나갔다. 거의 모든 한국의 젊은이들은 가장 위험하다 할 수 있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대전의 의미도 이해했다. 또한 그들은 표현의 자유를 열망하는 한국의 뒤에 동정적인 국제 사회의 여론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사실 그들은 폴란드 독립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거주지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동화정책을 실패로 이끈 진짜 이유이다.

한마디로, 구 동화정책은 한국인들을 구속복을 입혀 헌병경찰과 순경과 첩자의 눈으로 면밀히 감시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몸부림을 치면 '더 꽉 조이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또 꿈틀거리는 생명체는 동화될 수 없으니 더 심한 차별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속복을 입히는 동화정책이 단호한 군국주의자에 의해 제대로 이루어졌따면 현실이 되었을지 모른다. 동화정책이 성공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은, 첫째로 군국주의자들에 의해서만 정책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개혁의 성격이 아닌 오직 억압만이 환자들에게 허락되어야 한다. p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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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권력 또한 축소되어야 한다. 사람을 체포하고, 재판하고, 형을 선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경찰을 생각해 보라. 이것을 즉결재판이라고 하는데, 1916년과 1917년 사이에 경찰은 8만 2천 명이 연루된 5만 6천 건의 사건을 그런 식으로 처리했고, 그중 8만 1천 명 이상이 형을 선고받았다. 사람들이 경찰을 군인만큼이나 두려워하는 것이 놀랄 일도 아니다. 재판을 기다리는 한국인들의 숫자가 1910년에 631명에서 1916년에는 1만 5259명의 엄청난 수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유죄 판결도 6390명에서 1만 7577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한국인이 일본의 차별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예방책은 자치 정부의 통솔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것이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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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동화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며, 때로는 그것을 훼손하려는 자들을 무너뜨린다.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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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한국어를 쓰는 것이 가장 필요한 한 가지라는 점을 인식했더라면, 이러한 사소한 차별과 결함은 간과될 수 있었을 것이다. 조국에 대한 사랑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 중에 모국어만한 게 없다. 그런데 모국어를 고전 과목의 형태로만 가르칠 뿐 학교에서 없애버린다는 것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까지 극도의 분노를 살 일이다. 민중의 의지를 무시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바로 그 오랜 골칫거리인 강제 동화정책이다. 동화정책은 한국 역사 교과서의 사용 또한 금지하고 있다.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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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100명 가운데 99명은 개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 것이다. "무슨 개혁 말입니까? 우리는 개혁의 혜택을 얻은 바 없습니다." 유쾌하지 못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현재로서는 한국인들을 달랠 만한 개혁의 효과가 현실적으로 신통치 못하다. 한국인에게 지금까지 발표된 개혁을 상세하게 짚어가며 검토해보게 하면, 그는 개혁이 되었다는 것은 억지로 인정할 것이나 결국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개혁이오? 당신은 그런 것을 개혁이라 부릅니까?" (...)

마찬가지로, 상당한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 농민과는 다를지라도 한국인 순사 역시 눈앞에서 매달 30엔의 특별 수당이 일본인 동료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화가 치밀 것이다. 이러한 불편한 감정은 차별 철폐가 공식적으로 선언됨으로 인해 심화될 뿐이다. p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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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한국인이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교육에 무관심하다고 언급한 것은 불공평하다. 한국인이 교육 자체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동화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 제도에 결단코 반대하는 것이다. 학문을 가르치는 대신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과도하게 주입하고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을 한국인들이 반대하는 까닭에, 아이들을 학교에 오게 하려고 뇌물까지 준다는 말이 사실일 것이다. 독자들이 내가 당국의 입장을 불공정하게 다룬다고 생각지 않도록, 나는 1917년 6월에 송도에서 조선총독부 전 학무국장인 세키야 데이자부로가 한 말을 인용하겠다.

"나의 견해로 한국인 교육의 기본 원칙은, 한 마디로 말해, 한국인을 일본 제국의 국민으로 키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인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마음에 충성과 애국의 정신을 기르게 하는 데 있다. 교육과 관련된 법령과 지시는 이러한 용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이 이러한 교육 기관을 지지하고 통학하는 데 열심이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한일병합조약 이후에 정부는 많은 한국 학교를 폐쇄했다. 교사들이 일본어를 사용하는 걸 거부한 탓도 있고, 새로운 요건에 따라 학교를 지원할 기금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합병과 동화정책이 국민들의 모든 희망을 빼앗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교육에 관한 명백한 무관심을 얼마간 설명해준다.

이제 한국인들은 독립을 이루리라 믿고 있기에 희망에 가득차서, 학교에 입학하려는 지원자가 정원의 4~5배 이상에 달한다. 최근 부산의 한국 학교 교장이 학교 건물 확장을 위해 3000엔씩 모아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그들은 더 나아가 "부산의 한국인 교육을 위해 우리들이 해마다 8만 엔씩 기부하겠다."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한국인들이 한국 학교를 완전히 관리하고, 일본 학교와 동일한 교육의 목적으로 한국 학교가 설립된다면, 한국인들 또한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학교협회를 조직하거나 일본인들처럼 자금을 기꺼이 지원할 것이다. 구 정권 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한국인들에게 학교협회가 없다고 해서 비웃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최근 그러한 학교협회의 설립을 허가받고자 당국에 신청한 한국인이 넷이다. 이것이 허가될지 안 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p113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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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자신들이 독립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상황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자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기원, 이상, 언어와 문화가 일본인들과 다르기 때문에, 국민성의 박탈과 강제된 동화정책은 그것들이 시도되었던 다른 모든 국가들에서 그랬듯이 한국에서도 대실패가 될 것이다. 한국인들에게는 그들 속에서 불타고 있는 민족정신을 표현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이런 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는 소란만 있을 것이다.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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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일반 민중을 위하여 그 지식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는 국가에 대하여 쓰레기통 끄는 마차꾼보다도 그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교육받은 사람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을 힘써 도와주어야 할 것이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지식을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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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청년이 '노동은 천하다'는 사상을 버리기 전에는 한국에 희망은 없다. 수개월 전에 나를 위하여 노동하던 한 한국 청년이 있었다.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더 일할 수 없다. 일이 너무 어렵다."라고 했고, 그 청년의 부모 또한 "저 아이가 외아들이므로 집에 돌아와서 쉬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 노동이 그대들을 죽일까 걱정하지 말라. 만일에 노동이 사람을 죽일 것 같으면 한국 여자는 벌써 다 죽었을 것이다. 한국에 있어 크게 필요한 것은 바로 산업의 발전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하고자 하는 국민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p16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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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사회에 더 큰 일을 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큰 특권인 동시에 큰 책임으로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육을 받았노라고 교육 못 받은 사람을 업신여기는 폐단을 주의하시오. 교육으로 동포 간에 틈이 벌어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서로 더 굳게 합하여야 되겠습니다. 나는 수천의 학생들이 자기 시골로 돌아갈 때는 더욱 시골 동포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접촉하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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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육가들은 어느 때쯤이나 미국의 아이디어와 방법을 그대로 베끼기를 그만두고 그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스스로 창조적인 사고를 할 것인가? p214 (1962. 서울대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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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동양척식회사 같이 잘 조직된 약탈자들이나 일본인들한테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보고 있었다. 말하자면 학자가 무인보다 우수한 것처럼 뛰어난 문화를 가졌지만, 약하고 우유부단했던 한국을 천황에 대한 신봉과 지독하고 봉건적 군국 분위기에 젖은 문화를 가진 자들이 정복한 것이다. 만약 한국을 정복한 나라가 일본이 아니라 군사 전수로가 황제 신봉 외에도 법률에 대한 공정에 큰 관심을 보였던 로마였다면, 그들은 한국을 완전 정복하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아마 법률의 공정성이란 점에서 로마에 비길 만한 제국은 찾기 힘들 것이다.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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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혹은 열흘 내에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든 무식한 사람이든 거의 모든 시민들이 다같이 어떤 형태로든 항거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당시 국민은 하나로 뭉쳐 있었다.

그 좋은 예의 하나로 종로의 가게들이 5일 동안 모두 문을 닫았던 것을 들 수 있다. 상인들도 3.1운동에 대해 그들이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시위한 셈이었다. 하루이틀이 지나자 가게문을 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 명령을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 순경들은 문을 열든지 잡혀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경들이 문턱에 와 있으면 문이 슬슬 열렸지만, 이들이 떠나기만 하면 문은 또 닫혔다. p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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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당시의 젊은이와 늙은이들에게 진 커다란 빚을 잊지 마시오."

이 몇 마디는 내가 오늘의 한국 청년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다. 국민은 불의에 항거해야만 하고 목숨을 버려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일종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고 조금은 광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한국의 역사책을 불태웠고 압수했다. 한국 민족이 이미 싹튼 제국주의 사상에 서서히 물들어 갔다면, 그 책과 한국의 언어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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