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키경성 | 전봉관 _ 부동산 투기가 판을 쳤던 식민지 조선의 생생한 현장
저자의 필력이 상당합니다. 마치 영화를 보듯 근대 조선의 풍경 속에 풍덩 빠져들게 되는데요. 나진의 땅값이 천 배나 오르고 부동산 투기가 판을 치고, 일종의 선물 거래인 미두시장은 지금 비트코인 저리 가라 할 만큼 대박을 차는 사람과 쪽박을 차는 사람으로 연일 북적입니다. 자본주의가 들어온 근대 조선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특수를 노린 매점매석, 금광 개발 등 돈을 둘러싸고 연일 각종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그 모습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놀랍습니다.
신흥재벌에서 불과 몇 년만에 거지가 된 반복창, 부동산 성공신화의 주인공 김기덕, 미두판에서 큰 재산을 벌어들인 사람들, 친일신문이라고 매일신보사를 몇 달만에 그만두고 월급을 반밖에 주지 않았던 다른 신문사에서 일했다가 연이은 사업실패 후에 열렬한 친일파로 변신한 김기진 등, 돈을 둘러싼 근대 조선의 다양한 일화들을 추적하던 이 책은 중반을 지나면 내용이 전환됩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제산을 크게 불린 몇몇 이들이 실천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제입니다.
28번의 실패 끝에 쉰이 넘어 금광왕이 된 이종만. 그가 돈만을 추구했다면 그는 그렇게 끊임없이 도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백만장자가 된 이후에 자신이 번 돈을 광산 노동자들과 나누고 사회에 아낌없이 환원하고, 학교를 세웁니다. 그가 세운 대동공업전문학교는 나중에 김책공업대학이 되죠. 이상 사회에 대한 나름의 꿈이 있었던 그는 해방 후에는 자진 월북합니다. 자본가로서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인물입니다.
잘 알려진 남강 이승훈 선생의 과거도 흥미진진합니다. 10대 때부터 보부상으로 일했던 그는 유기공장을 차려 노동자들에게 두 배의 임금을 주면서도 생산력이 높아 큰돈을 벌지만 청일전쟁이 일어나 다 날립니다. 러일전쟁 때 쇠가죽을 매집하는 등 재기하려고 다양한 장사를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 고향에 칩거했을 때 그의 나이 사십대 중반이었습니다. 그 즈음 이승훈 선생에게 운명 같은 만남이 찾아옵니다. 우연히 안창호 선생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선생은 개명하고 삶을 바꿉니다. 교육자 이승훈 선생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두 분 여성 사업가들의 이야기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십대에 과부에 되어 평생 혼자 살면서 온갖 설움과 고초 속에서 막대한 부를 일구는데 성공한 백 과부. 환갑이 되면서 그가 펼친 아낌 없는 기부에 사람들은 과부라는 말 대신에 백선행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평생 외롭게 돈을 모았지만 전재산을 학교와 사회에 쓰면서 그는 행복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최송설당의 과거는 그리 존경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젊은 날에 갈라선 남편이 부정축재로 돈을 모았다고도 하고, 영친왕의 보모였다고도 하고 여러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거에 어떠했든 간에 최송설당은 환갑이 되어 통 크게 결단합니다. 지역민들의 숙원이던 김천고보 설립에 전재산을 기부한 거지요. 최송설당 역시 남편도 자식도 없는 외로운 삶이었지만 생의 막바지에 아름다운 선택으로 전혀 다른 말년을 보냈습니다. 그 자신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짐을 느끼고 지역민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기부로 행복해진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지요.
그렇게 이 책은 식민지 조선에서 돈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부동산, 미두, 주식, 금광, 무역 등에 뛰어든 다양한 군상들을 따라가다가 이 들끓는 욕망의 도가니에 끝까지 머물지 않고 삶을 전환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부러움의 대상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들은 누구보다 돈을 행복하게 제대로 썼던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각종 스토리를 재미있게 읽고나면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이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돈'에 관한 욕망이라면 그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지금, 누구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름다운 삶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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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답게 김기진은 밤낮없이 일확천금할 수 있는 치부법을 연구했다. 몇 달 동안 치열하게 연구한 끝에 당시 조선에는 다섯 가지 치부법이 있음을 깨달았다.
'첫째, 임업, 둘째 어업, 셋째 광업, 넷째 미두와 주식, 다섯째 고리대금업'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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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셋에 금광왕에 등극한 이종만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30년 동안의 28번 실패 끝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1930년대 금광 하나 잘 만나 하루아침에 백만장자 반열에 올라선 사람은 한 해에 10여 명씩 어김없이 나왔다. 세상 사람들이 진정으로 감탄한 것은 그의 '화끈한' 씀씀이였다. 그 어떤 금광왕도 이종만만큼 돈을 아름답게 쓰지 못했다.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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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만원에 영평금광을 매각한 뒤 이종만이 대동농촌사를 포함해 사회에 환원한 돈은 통틀어 80만 원에 달했다. 매각대금의 절반을 사회에 던지고도 '내가 할 의무를 한 것에 불과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더 나아가 이종만은 "가족들 생활은 1~2만원이면 족하니 나머지 재산은 죽기 전에 꼭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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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은 부를 누리기 위해 돈을 좇은 것이 아니라 부를 베풀기 위해 집요하게 돈을 좇았다. 그에게 돈은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종만은 자본가 신분임에도 '노동자의 나라'를 표방한 북한으로 자진 월북했다.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꿈을 일찌감치 포기했다면 이종만의 실패는 29번째에서 그쳤을는지도 모른다.
부자가 되기 전 마음과 되고 난 이후의 마음이 꼭 같은 사람은 드물다. 부자가 되고 나면 가난한 시절 품었던 꿈을 잊어버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종만은 부자가 되기 전이나 후나 늘 한결같았다. 이종만의 실패가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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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서울로 옮겨간 이승일은 러일전쟁을 틈타 전시물자인 쇠가죽을 매집했다. 쇠가죽을 2만 장이나 매집해놓고 전쟁이 재개되기를 기다렸지만, 그해 9월 전쟁은 허망하게 끝났다. 이승일은 쇠가죽을 배에 싣고 잉코우로 가서 헐값에 방매하고 귀국했다.
연이은 실패로 장사에 환멸을 느낀 이승일은 2년간 고향에 칩거하면서 책과 신문을 읽으며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그동안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군대는 해산되었고, 고종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책임으로 강제로 퇴위당했다.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차에 평양에서 안창호를 만났다. (...)
평양에서 안창호를 만나고 머리를 깎은 이승일은 고향에 돌아와 술과 담배를 끊고, 44년 동안 사용한 이름까지 버리고 이승훈으로 개명했다. 이승훈은 서당 간판을 내리고 그 자리에 강명의숙을 세웠다. 강명의숙은 평안도 최초의 사립 초등학교였다. p20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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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민족의 장래에 대한 감동적인 연설을 기대했던 학생들에게 서너 시간 동안 이승훈이 들려준 이야기는 너무나 소박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뜰을 쓸어야 합니다. 각자 자기 방을 치워야 합니다. 교실을 깨끗이 쓸고 정돈해야 합니다. 변소를 올바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이 곧 사람이 되는 길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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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은 큰 상인이요, 겨레의 큰 스승으로 역사에 우뚝 서 있지만, 정작 그의 인생은 실패와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는 열한 살에 유기점 잔신부름꾼으로 들어가면서 과거 급제의 꿈을 포기해야 했고, 서른한 살에 청일전쟁 전란을 만나 알거지가 되었으며, 서른아홉 살에 엽전 1만 냥을 물에 수장시켰다. 마흔 살에 옥수수, 마흔 한 살에 명태, 마흔두 살에 쇠가죽을 매점했다가 큰 손실을 보았다.
마흔여섯 살에 평양에 자기회사를 차렸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마흔일곱 살에 이탈리아 파마양행과 직수입 무역을 하려했으나 이탈리아인 지배인의 농간으로 사기를 당했다. 마흔여덟 살에 무관학교 사건에 연루돼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마흔아홉 살에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돼 5년간 옥고를 치렀다. 쉰여섯 살에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해 3년간 수감되었고, 예순세 살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 (...)
그의 마지막 소망은 생물 표본이 되어 사랑하는 학생들 곁에 머무는 것이었지만, 총독부의 방해로 마지막 소망마저 이루지 못했다. p207-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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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산리 사람들은 백 과부의 음덕으로 준공된 다리를 '백 과부 다리'라 불렀다. 그 시절에도 '과부'란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동네 유지들은 그처럼 착한 일을 한 사람을 '백 과부'라 부르기 민망하다 하여 '과부' 대신 '선행'이라 부르고, 다리 이름도 '백선교'라 고쳐 불렀다. 조선의 윤리와 법도가 아직 굳건하던 헌종 시절 태어난 백 과부는 환갑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름을 얻었다.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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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도 모르고 자식도 없는 백 과부가 학교 경영권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단지 조선의 젊은이들이 가난해서 못 배우는 설움만큼은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피땀 흘려 모은 18만원 상당의 금쪼같은 재산을 조건 없이 기부한 것이었다. 친지들이 돈을 그렇게 마구 쓰다간 얼마 못 버틴다고 충고할 때마다 백 과부는 이렇게 말했다.
"돈이란 것은 써야 돈 값을 하지, 쓰지 않으려면 돈은 모아서 뭐하나."
그렇듯 돈을 아낌없이 기부한 덕분에 글 한 자 읽지 못하는 백 과부는 위대한 교육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에서 축사할 때마다 백 과부는 자신의 인생철학이 담긴 진심 어린 당부를 잊지 않았다.
"너희들은 조선의 아들이요 딸이다. 졸리다고 자지 말고, 놀고 싶다고 놀지 말고, 공부하기 싫다고 책 덮어두지 말고, 언제든지 부지런히 책과 씨름을 해라. 상급학교 올라가서 어려운 공부를 더 잘해야 우리나라가 잘된다." p22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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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보통학교, 숭현여학교, 광성보통학교 교정에는 백선행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백선행기념관에는 동상이 세워졌다. 백 과부는 환갑에 이르기까지 악착같이 모은 돈을 남은 생애 26년 동안 한 푼도 남김없이 쓰고 가려 했다. 그 기간 백선행이 사회에 기부한 금액은 무려 31만 6천여 원, 현재 가치로 316억 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사회에는 이처럼 거금을 기부한 백선행이었지만, 사치를 일삼고 기생집 출입이 잦았던 양자 안일성에게는 여러 필지로 쪼개진 수천 원 상당의 땅을 조금 남겼을 뿐이었다. 자신이 죽고 난 후 자식이 땅을 팔더라도 한꺼번에 다 팔아서 빨리망하는 일을 막기 위해 어머니로서 행한 마지막 배려였다.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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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행의 아낌없는 기부는 다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동안 백선행은 사회로부터 엄청난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사회적 존경과 찬사 대신에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했더라도 백선행은 자신을 위해 돈 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평생 길들인 입맛이 있는데 매끼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는다고 맛있을 리 없었을 것이고, 화려한 집에 산다고 마음 편할 리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비싼 음식 비싼 옷이라도 내게 맞지 않으면 비싼 돈 주고 불편을 사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백선행은 한평생 악착같이 모은 전 재산을 학교와 사회를 위해 쓰면서 심리적 포만감과 행복을 느꼈다. 덤으로 사회적 존경과 찬사까지 받았다. 돈이란 백선행처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써야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쓰지는 말아야 한다. 백선행의 행복한 돈 쓰기는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돈은 백선행처럼 써야 돈 값을 한다.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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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최송설당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도,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재산을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곳에 쓰려고 결심하고, 자신을 낳아서 길러준 고향 김천의 숙원 사업 김천고보 설립에 전재산을 기부했다. 처음엔 주저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막상 모든 것을 비우고 나니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고향 사람들의 진심어린 사랑과 존경을 받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다.
최송설당은 동상을 봉정받은 지 4년이 지난 1939년 천수를 누리고 여든다섯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말 못할 숱한 사연을 간직한 최송설당은 재산을 움켜쥐고 있던 순간,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고 사랑을 받아보지도 못한 불행한 여인이었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비우고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 만인의 추모와 애도를 받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다.
어쩌면 최송설당은 그다지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움의 숭고한 의미를 일깨워준 마지막 승부로 인해 최송설당은 세상을 떠난 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한평생 뜨겁게 살다간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억된다. 30만여 원의 기부로 가장 행복해진 사람은 결과적으로 최송설당 자신이었다. p261-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