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역사, 인물

고투 40년 / 이극로 _ 온세상을 보고 나면 무엇이 하고 싶을까

릴라~ 2021. 8. 22. 15:48


한참 전에 사둔 책을 이제야 읽는다. 두께가 있는 자서전이라 맘먹고 펼쳤는데 아뿔싸, 이극로 선생의 회고담은 50장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해제 및 관련 자료이다. 진작 읽을 껄~

읽고 나서 1893년생인 이분의 인생 행로가 너무 놀라워 D에게 이야기하니 이렇게 말한다.

"온 세상을 보고나면 뭐가 궁금해지는지 알아? 나는 누구인가지. 나에 관심이 생겨."

"그래서 이분이 경제학을 전공하고 편하게 살 길이 많았는데 한글 연구를 선택했구나."

"그랬겠지. 도올 김용옥 선생이 왜 민족주의자가 되었겠어? 그분이 세상을 봤거든."

"맞다. 도올도 그렇지."

"넓은 세상을 본 사람의 인생은 두 가지 길로 나뉘어. 나라 팔아먹거나 아니면 민족주의자가 되거나."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그 시절, 남이 못 보는 세상을 경험하고 견문을 익힌 사람이 그랬다. 친일파가 되거나 민족주의자가 되거나. 이극로 선생은 후자였다.

나는 이극로 선생이 일제 시대에 독일 유학을 떠나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분이 그 시절에 이토록 드넓은 세상을 경험했을 줄은 몰랐다.

경남 의령 출신으로 열일곱에 집을 나와 머리 깎고 신학문을 익히고 서간도와 상해에서 활동하고 베를린과 런던에서 유학하고 1929년 귀국할 때까지 아시아, 유럽, 미국까지 두루 시찰한다. 유럽으로 향하던 중 홍콩, 베트남을 거쳐 이집트 피라미드와 박물관 등을 보고, 러시아에서는 트로츠키의 연설을 듣고, 영국 수학 중에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보고, 프랑스를 방문하고(당시 프랑스에서 음성학자와 함께 작업한 레코드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귀국길에는 미국을 동부에서 서부까지 횡단한다. 미국의 대도시와 포드사 같은 유명 회사는 물론 인디언 마을과 그랜드캐년까지 탐방한다. 책의 부제를 '지구를 한 바퀴 돈 한글운동가'라고 붙인 이유를 알겠다.

그냥 여행이 아니었다. 경제학 전공자답게 여러 도시를 시찰하며 한 사회의 경제와 문화의 근간을 보고자 했다. 그렇게 온세상을 보고나서 그가 선택한 길은 '한글 연구'다. 주시경 선생이 서른일곱에 갑자기 세상을 뜬 그 빈 자리를 이극로 선생이 최현배 선생 등과 더불어 메꾸고 조선어학회의 수장으로서 필생의 과제인 사전 만들기 작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당시에도 세계를 유람한 인물들이 있지만 방문한 지역과 국가, 시찰한 장소의 다양함을 보면(공장과 산업지대도 많다), 이극로 선생의 식견에 따를 자는 없을 것 같다. 만주에서는 마적단 비슷한 무리에 붙잡혀 총살 직전까지 갔으나 그의 호소에 괴수가 풀어준 일도 있다. 때로는 무전여행을 하고 굶어가며 공부하고 또 많은 이들이 추천서를 써주며 도와주고 학비를 보태준 것을 보면 그의 인품이 상당히 매력 있었던 모양이다. 독일 베를린대학 재학시에는 조선어학과를 개설해 3년간 가르치기도 했다.

요즘 사람도 이처럼 살기가 어렵다. 그 대담한 행보와 꿈의 스케일을 보면 위인이란 이런 분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다. 자서전에서 개인적 에피소드가 생략되고, 행적 위주로 간단하게 설명된 점이 아쉽다. 정말 드라마틱한 행보인데, 묘사는 많지 않다.

정말 잘 살았다 싶은 인생인데 김구 선생을 따라 남북연석회의차 평양에 갔다가 눌러앉아 월북 인사가 되어 남한에서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은 분이다. 가족들도 보도연맹사건 등으로 죽거나 연좌제로 고통을 겪었다 한다. 다행히 이극로 선생 본인은 북쪽에서 학계에 머무는 바람에 김두봉처럼 숙청되지 않고 계속 연구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학자와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한계를 거침없이 뚫고 간 한 천재의 삶의 행적으로부터 영감을 얻게 되는 책이다.






https://youtu.be/d-hnGoG3c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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