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조지 포크 지음, 사무엘 홀리 편집)
구한말 조선을 여행한 서양인의 기록은 장바구니에 담아둔 한 권 빼고는 다 읽은 줄 알았는데 고산도서관에서 내 목록에 없던 책을 발견했다. 미국 외교관의 최초 조선 보고서다.
이 책은 기존 여행기나 기록과 차이점이 있다. 1884년이라는 이른 시기가 그렇고(읽은 것 중에서는 제일 이른 시기인 듯), 또 하나는 다른 여행자들과 달리 조선의 관료와 똑같이 가마를 타고 수행원을 거느린 채 조선 각지의 감영을 돌면서 대접을 받으며 여행했다는 것이다. 아, 사진을 즐겨 찍고 직접 현상하며 여행한 것도 특징이다. 안타깝게도 여행중 강물에 몽땅 빠트리기도 하지만.
서울을 떠나 삼남대로를 따라 수원을 거쳐 공주의 충청감영, 전주의 전라감영, 나주, 담양, 순천, 함양, 진주, 창원, 김해를 거쳐 부산까지, 그리고 다시 북상하여 대구, 상주, 문경새재 거쳐 서울로 귀환한다. 대단한 여정이다. 눈 내리는 문경새재를 지날 때는 갑신정변이 터져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저자는 민영익의 서찰(허가증)을 들고 여행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행하게도 고종이 파견한 호위부대를 만나 남한산성으로 피하고 미공사관으로 복귀한다.
이 책의 장점은 지루할 정도로 세밀한 조선의 지리와 지역의 특색에 대한 묘사, 그리고 그가 만난 조선 관료들에 대한 묘사와 구한말의 풍습이다. 그는 서방세계에서 자신이 최초로 조선 땅을 샅샅이 본다는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너무 힘든 여행이라며 불평하면서도 섬세한 붓끝을 놓지 않는다.
그가 도착하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대접하는 감영의 모습, 국제 정세를 전혀 모르는 관료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당시 청나라 아편전쟁이 터진 지 이미 몇 십 년 뒤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법도 한데 정말 무지했고, 자기 사는 곳의 지리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1860년에 돌아가신 수운 최제우 선생 같은 이도 유학과 왕조정치로는 더이상 안 된다는 인식을 가졌는데 말이다. 저자는 대동여지도를 들고 여행했으나 조선 사람 중에서 그렇게 한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 같다.
조선의 야만적인 모습에 줄곧 놀라던 저자가(구경꾼 때문에 화장실도 못 갈 정도) 조선의 음식이 소화가 잘 되고 맛이 좋다고 칭찬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은 이 책에도 이어지는데, 조선은 상업이 발달하지 않다보니 돈을 정당하게 벌 기회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든 남의 것을 빼앗으려 했으니.
저자는 전라감영 선화당에서 본 의례에 엄청난 감동을 받는데 조선의 의식은 특색이 있었던 것 같다. 순종의 장례에 참석했던 서양인이 전세계에서 최고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한편으론 웅장하고 화려한 문화를 가졌으면서도 한편으론 너무나 닫혀 있고 왜소했던 나라가 조선이었던 듯하다. 대구에 십 년이나 부임했으면서도 동래(부산)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지리에 무지한 관료들이 뭘 제대로 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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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라 안에는 정부에 빌려준 이 쌀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백성들이 읍내의 창으로 쌀을 가져가면, 그곳의 관리들은 이 양을 계산하면서 가능한 한 가장 많은 양을 착복하려고 저울추를 높이 쌓아 눈금을 속인다. 봄이 되어 쌀을 돌려줄 때는 저울추를 덜어내고 자기들이 받았던 양이 그만큼이라고 우긴다. 이렇게 해서 쌀 전체 양의 1/3에서 절반쯤을 백성들로부터 갈취한다. 세금으로 쌀을 받을 때도 다시 같은 수법이 등장한다. 받을 때는 저울추를 쌓아올리지만 읍내 관리가 이를 왕에게 보낼 때는 저울추가 다시 내려간다.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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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보여 줄 때나 줄 때, 내가 이 조선 관리들을 좋아하는 한 가지 이유는 각 관리가 그중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도 건넨다는 것이다. 커피를 끓일 때마다 매번 절반을 마시고 나머지는 십여 명 이상의 방 바깥에서 어슬렁거리는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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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모든 것에 큰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평화를 지향하는 문명국 미국 정부의 하급 관리로서 나라를 대표해 아직은 미개하지만 화려한 옷을 걸친 위대한 족장(전라감사) 옆에 앉아 있었다. 생기 넘치는 의상을 입은 그의 용사들과 춤추는 소녀에 둘러싸인 관아의 대청과 왕정국가의 위엄을 보여주는 다른 모든 기물들은, 보통 책에서만 볼 수 있었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현실이었다. 나는 제복이 아닌 단정한 캐시미어 정장을 입었지만 옷차림으로만 보면 정말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우리 문명은 내가 우리를 대표한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이 감사는 나를 보고 말했다. "나는 나이가 50인데 (서양 문명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너는 28살이고 나는 오히려 (나이가 많지만) 어린아이, 학생일 뿐이다. 많은 백성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의 관리인데도 (새로운 과학과 문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이는 좀 이상한 말이지만 나의 가슴을 파고드는 말이었다. 나는 이 말에 무척 감명을 받았다. P19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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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큰 주막이었지만 끔찍하게 더럽고 벌레가 많았으며 진흙투성이의 무너져 내릴 듯한 가축우리 같은 오두막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감히 좋은 집을 지으려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관아의 관리가 그들을 붙잡고 돈을 내어놓으라고 한다는 것이다-냉혹한 강도들이다-. 나는 오늘밤 몸에서 약간의 거대한 이들을 발견했다. 군령다리는 장성에서 40리 거리다. 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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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얼굴과 옷, 자세는 평생 본 중에 가장 흥미로운 것이었다. 진정으로 아름다웠다.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다. 방패 모양의 광배, 불상 모양, 물결무늬 등 작품 구석구석이 세밀했고 전체적 효과가 비할 데 없이 장엄했다. 그리고 디자인이나 작품의 특징이 전혀 동양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담에 둘러싸인 땅이 움푹 파인 곳 혹은 사각형 구멍에 똑바로 세워졌다. 분명 받침돌 위에 올려져서 때때로 본당에 들여놓기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올려질 때는 틀림없이 장엄한 자태였을 것이다. (...) 만복사지 석인상 앞에서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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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일이 조선 관리들에 대해 긴 이야기를 했다. 그가 말하기를 과거 오랜 세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강건한 남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이 왕조 정부의 관례였다고 했다. 그들이 정부에 대항해서 힘을 쓸까봐 두려워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남자들은 공포와 침묵 속에 살아간다고 했다. 만약 아무리 사소한 사유라도 그들에게 불리한 혐의가 제기되면 참수형을 당한다고 했다. '통영의 영웅'은 나라를 위해 수많은 일본인을 죽인 후, 결국 자신의 힘을 보여준 행위로 목숨을 잃을 것을 알고, 일본 함대가 빤히 볼 수 있는 자신의 뱃머리에 서서 일본인의 총에 맞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범죄자처럼 처형당하는 것을 피했다. 따라서 일본이나 중국과의 전쟁 때에는 강한 선량한 사람들이 패배하든 승산이 있든 간에 죽음이 그 결과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부에 봉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P28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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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행은 앞으로 상당 기간 어떤 외국인에 의해서도 이뤄지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음식은 정말로 무척 괜찮은 편이다. 맛도 좋고 소화도 잘 된다. 나는 예전에 조선 음식의 모양새와 냄새를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었다. 세상의 다른 어떤 외국인도 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처럼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믿기 힘든 이야기로 들릴 지도 모르지만 나는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거칠어지려고 스스로를 내몰고 있다.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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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곳에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여전히 눈과 비가 오락가락 했다. 이 조용한 수행 장소는 기분을 좋게 해준다. 승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다른 곳에서 생활했던 경험으로 인해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승려들은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해인사에서) P299-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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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라도를 떠난 이후 만난 사람들에게서 타 지역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곳의 사람들은 시끄럽고, 목청이 컸으며, 못생기고, 거칠었다. 모든 면에서 호감이 가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무례하고 야만적인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다. 옷차림과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친절한 자세로 잘 지내보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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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는 경상도에 10년간 있었다. 그는 대구의 판관이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그곳을 방문했을 때 백성들의 호기심 때문에 많은 고충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는 오십이었지만 젊고 힘이 세 보였다. (...) 나는 진주에서 동래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다. 그는 펄쩍 뛰더니 창문을 팡! 열었다. "진주에서 동래까지 얼마나 되느냐!" 그는 커다랗고 맹렬한 목소리로 마당의 전체 무리를 향해 소리쳤다. 대답이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거리를 아는 놈이 이곳에 하나도 없느냐?" 그러더니 애절한 목소리 하나가 무언가를 말하더니 결국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내가 예전에 만난 모든 조선 정부 관리에 대해 말했듯이 이 남자도 조선 지리에 관해 나보다도 아는 양이 엄청 적었다. 그리고 조선을 많이 다녀보지도 않았다. 이 지역에 10년을 있었는데 부산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니! (합천에서) P31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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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아침 화장실에 가려고 몇 번을 시도했다. 하지만 무뢰한들이 따라왔고 심지어 앞서갔다. 나를 지켜보는 시선에 둘러싸여, 나는 품위를 지키며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화장실 가는 것을 포기했다. 마침내 수일이 내게 물통을 가져왔다. 오늘 아침에 내가 세수를 했던 통이었다. 그리고 나는 방 안에서 이것을 소변기로 사용했다. 이때 역시 몇 명의 아전이 군중을 두들겨 패서 몰아내는 와중이었다. 실제로 창문이나 방문의 구멍으로 안쪽을 엿볼 수 없게 충분한 거리로 내몰았다. 목사가 나를 도우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가 이에 대해 큰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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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관련 협잡: 고을 b에서 쌀 1,000가마니가 서울로 향하는 배에 선적하기 위해 항구로 보내졌다고 가정해보자. 아전이, 아마도 자신의 사익을 위해, 또 고을의 관리를 위해 동행한다. 배는 어느 조용한 곳에 정박하고 800가마니가 팔린다. 그런 다음 빈 가마니는 모래가 채워진다. 배는 너무 많은 무게를 감당해야 하고 또 누군가가 뚫어 놓은 구멍 때문에 결국 침몰한다. 서울로는 나쁜 날씨 때문에 배와 쌀 1,000가마니를 잃었다는 보고가 올라간다. 이것이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증기선을 극렬히 반대하는 이유다.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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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는 큰 장이 열리고 있었다. 해년마다 열리는 규모가 큰 장으로 10일째 진행되고 있었다. 장터의 무뢰배들 사이로 들어가는 위험을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는 거북한 상황이었다. 나는 전반적으로 조선인들에게 쓰라린 감정을 느꼈다. 그들의 무례와 나를 진기한 수집품처럼 대하는 반 야만적인 행도응로 인해 그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배려가 무색해졌다.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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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끔찍하고 불행한 하루를 보냈고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 묵과 수일에게 나를 위해 싸울 생각을 버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들을 위해서는 바짝 경계를 하라고 했다. 또한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그들이 나와 함께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책임을 져야 하는 그들의 아내와 아기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나와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들의 친절과 도움은 언제나 칭송을 받을 만했다.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 조국이 그들에게 보답을 하기를 바랐다. (...) 묵과 수일은 조선 정부나 조선인들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이다. P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