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일상을 적다

하느님도 비틀거리신다. 1/17 묵상

릴라~ 2022. 1. 21. 23:12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오늘 복음에서 눈에 띄는 내용은 예수께서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가장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아들'보다 더 와닿는다. 제자들은 예수를 '선생님', '스승님'이라고 불렀다.

성서 저자들이 예수의 세속적 삶을 생략하고 6살인가 7살에서 서른 살로 훌쩍 건너뛴 것은 그래서 아쉽다. 그 사이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그분의 인간적인 면모가 더 잘 드러났을 텐데, 성서 저자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더 강조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건 내가 성서학을 공부하지 않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예수께서도 오락가락, 갈팡질팡하실 때가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교의 전통 안에 충실히 머물렀든, 그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폈든(이건 학자마다 의견이 다른 것 같음), 예수님 공생활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제자를 부르시고 가르침을 펼친 내용이다. 물론 수난과 부활도 크지만. 예수께선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북부 갈릴래아 지방에서 중부 사마리아를 거쳐 남부 유다 지방의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그 먼 길을 방방곡곡 다니셨다.

가르침의 핵심은 수난과 부활 사건을 제외하면,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이다. 우리들 각자가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는 것, 언젠가 썩을 육신을 지니고 살아가는 유한한 인생이지만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더 크고 신비롭고 영원한 생명 안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 사람에겐 하느님의 영이 깃들어있다는 것이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가 잘났건 못났건 상관없이. 그래서 성서엔 절름발이, 장님 등이 자주 등장한다.

(부처님도 만물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가톨릭이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하고 불교가 수행에 의한 해탈을 강조하는 차이가 있지만 지향하는 삶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린 사람, 깨달음을 얻고 해탈한 사람이 가는 길은 결국 사랑과 자비니까.)

그런데 오늘 내게 기쁜 소식은 '하느님도 불완전하다'는 사실이었다. 동학 관련 자료에서 얼핏 봤는데, 가톨릭 교리와는 다를 지도 모르겠다. 같을 수도 있고.

왜 불완전한가? 하느님은 고정된 상태로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물은 항상 생성 중에 있고 어딘가로 움직여가고 있고, '되어 가는 중'이기 때문에, 변화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언제나 불완전한다. 완전함은 우리 머릿속에서만 가능한 개념이고 모든 것이 정지했을 때 상정할 수 있는 개념이다. 모든 존재는 시공간 속에서 조금씩 변화하고 이행하는 과정에 있기에 언제나 불완전하다. 라캉도 비슷한 말을 했다.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보다 더욱 완성된 경지이며 부족한 것이 완벽한 것보다 더 견고한 것이라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불완전하다. 우리가 불완전하고 비틀거리며 걷고 있기에 하느님도 그 길에서 함께 비틀거리신다.

아마도 나는 죽는 날까지 비틀거리며 살 것 같다. 다만 그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목적지가 있고 하느님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썩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느님도 비틀거리신다니 괴로움이 좀 줄어들고 기쁨이 좀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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