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최승자
내가 대학 시절 참 좋아한 시인이다.
"가장 큰 하늘은 그대 등 뒤에 있다"
그 시구를 외우며 다녔다.
진짜 시적 감수성이 탁월한 분인데,
이 시인이 너무 힘겹게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최근에 언론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이분의 에세이집이 베스트셀러에 떠서 읽어봤다.
최근 글은 몇 편이고 전에 출판된 것을 재발매한 책.
그래도 반가웠다.
시인은 정신분열증을 오래 앓았다고 했다.
첫 글이 가장 강렬했다.
제목은 '다시 젊음이라는 차를'
시인이 1976년에 쓴 글.
글이 정말 젊다. 이게 젊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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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거대한 타의--오로지 물욕만을 따라 외곬로 뻗어가는 광기, 조직과 이데올로기를 앞세우고 돌진하는 무서운 능력, 그 아래에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삭과 야곱의 모든 살붙이들의 선량하고 괴로운 관계 등 그런 모든 것이 합세하여 내 운명의 세포조직을 만들고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내 인생과 운명의 배후에서 후렴처럼 비가 되어 내린다. 그 빗속에서 내가 꿀 수 있는 꿈이 자꾸 줄어들고, '인간답게'라는 가치 기준이, 진리가 자꾸 모호해져간다.
그래서 때로 한 10년쯤 누워 있고만 싶어질 때가 있다. 모든 생각도 보류하고 쉽게 꿈구는 죄도 벗어버리고 깊이깊이 한 시대를 잠들었으면.
그러나 언젠가 깨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의 황량함, 아아 너무 늦게야 깨어났구나 하는 막심한 후회감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결국 그 거대한 타의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인간답게 죽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대항해서 싸우는 필사의 길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밤에도 나는 이를 갈며 일어나 앉는다. 끝없이 던져지고 밀쳐지면서 다시 떠나야 하는 역마살의 청춘 속에서, 모든 것이 억울하고 헛되다는 생각의 끝에서, 내가 깨닫는 이 쓸쓸하고 고질적인 힘으로, 허무의 가장 독한 힘으로 일어나 앉는다.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독보다 빠르게 독보다 빛나게 싸울 것을. 내가 꿀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꿈이라도 남을 때까지." p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