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형사 박미옥 / 박미옥
누군가의 30년의 현장 분투의 기록을
이렇게 편안히 앉아서 읽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황송했다.
한 꼭지 한 꼭지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영화보다 더 긴박하고 뜨겁고 힘든 싸움의 기록이다.
하나하나 무겁지 않은 이야기가 없지만
그 이야기들이 담담하면서도 편안하고 술술 읽히는 이유는
저자가 자신과의 싸움과 세상과의 싸움을
거침없이 당당하게 헤쳐나갔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말이다.
언론에 오르내린 수많은 굵직한 사건들을 해결하고
여경 최초의 강력계 형사,,, 등
수많은 최초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우리나라 경찰 역사를 새롭게 쓴 사람이 바로 저자,
형사 박미옥이다.
평생을 살인 사건 등 강력범죄의 현장에서 보내자면
보통 사람 같으면 정신이 온전해지지 못하거나
아니면 세상에 대해 차갑고 냉소적이 될 법도 한데
형사 박미옥은 그 반대다.
그 누구보다 따스한 감성과 정의감을 갖고
피해자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그 비윤리의 현장에서 더욱 윤리와 인간됨의 소중함을
읽는 모두에게 일깨워준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다 재미있고 여운이 많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저자가 초고속 승진하는 데도 기여한
신창원 사건은 더 기억에 남는다.
살인범 신창원을 숨겨준 유흥가 아가씨들이
왜 그를 숨겨줄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갔다.
아가씨들이 싫어하는 그 노동을 시키지 않고
그녀들의 꿈을 물어주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밥을 먹고 그러면서 충분한 보수를 지급하고
그저 푹 쉬다간 한 남자.
아가씨들을 인간적으로 대한 유일한 남자가 신창원이었다.
그는 온몸에 문신이 있었기에 당연히
처음 보는 아가씨들에게 자기 몸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죄와 벌의 세계가 무거우니만큼
형사의 사건 판단에 대한 결과도 무겁다.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지우면 안 되니만큼
형사가 실수로 사건을 잘못 파악하고 범인을 잘못 추정하면
감옥에 수감되는 건 물론이고 몇 억의 구상권까지 청구된다.
그래서 저자는 형사를 '교도소 담벼락 위를 걷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무게감은 다른 공무원 직종과는 비교 불가일 것 같다.
부러운 점도 있었는데, 동료들과의 끈끈한 팀웍이었다.
학교 교원은 조직의 일부지만 모든 업무가 갈갈이 쪼개져서
마치 자영업자처럼 내 반, 내 업무만 정신없이 헤쳐가고
늘 혼자 일하는 듯한 막막함이 지난 20여 년간 있었다.
범인 검거는 팀웍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에
함께 공동의 목표를 위해 일하는 모습은
그 일의 어려움 여부를 떠나서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이제 30년의 그 뜨겁고 치열한 형사 생활을 마친 저자는
명퇴하여 후배 여형사와 제주에 마당을 공유하는 집을
각각 지어서 마주보고 산다.
마당에는 방문객들을 위한 멋진 서재 겸 카페도 새로 지었다.
자기 업에서 전문성을 기르고자 분투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훌륭한 모범이자 영감이 될 뿐만 아니라
은퇴 후 살아가는 방식까지 진짜 멋있다.
책 제목 잘 지었다.
형사 박미옥, 이보다 더 나은 제목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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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는 취조의 달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취조란 형사가 확신과 정답을 바탕에 깔고 자백을 토해내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형사란 내 앞에 앉은 한 사람, 그리고 종잡을 수 없는 이 세상을 향해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내가 확신할 수 없다면 상대에게 물어라.'
이 사건을 겪은 후부터 나는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일수록 내가 끌어내고 싶은 정답에 안달하기에 앞서 질문의 말머리를 상대에게 돌려 잘 묻는 형사가 되기로 했다. 범인 또한 질문을 받고 답하는 사이에 자신을 찾아가길 바라면서, 나는 내 질문을 돌아본다.
형사가 기억해야 할 질문의 미학은 관찰과 관용의 마음으로 상대를 향해 평가와 편견 없이 묻는 것이다. 질문할 때는 내 개인의 경험치와 기준을 내려놓아야 한다. 모르는 것도 질문하면서 알게 되고, 속단하지 않고 물어보는 사이에 상대의 생각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상대만이 아는 이야기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서 디테일하게 질문해야 한다.
형사는 내 정답과 확신을 고집하며 안달복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함으로써 알지 못했던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다그치면 마음이 닫히지만 질문하면 열린다. 형사는 그 변화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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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마음이 아프거나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대화 양상이나 욕구가 크게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똑같다. 아프나 아프지 않으나 제 말을 들어주길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상대에게 강조하고 싶은 감정은 거듭 입에 올린다. 상대의 시간이, 화법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물어주고,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 듣고 묻는 사이에, 화자가 스스로 차츰 진정하게 되는 것도 결국 다 똑같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감정이 끌려오는 관계에서는 경청하기가 쉽지 않다. 타인의 말을 듣고자 하는 귀보다 그에게 인정받고 내 감정을 호소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의 아픔보다 그로 인해 받은 내 아픔이 더 생생하기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는 현장에서처럼 일상에서도 늘 편견이나 감정을 섞지 않고 경청하는 연습을 해보려 하지만 매번, 경계에서 무너진다. 작은 소리도 크게 들으려면 품이 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한 사람을 제대로 안기도 버겁다.
그게 누구의 말이든 남의 말을 헛소리나 정신 나간 소리, 개소리로 치부하지 않고, 일단 잘 듣고 싶다. 사람의 말을 ㅜ기하게 챙겨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직도 많이 연습해야 하지만 이 바람만은 여전하다. p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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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인 내 앞에 앉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위기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불안에 휩싸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그런 그들에게 찰나일지라도 마음 놓을 수 있는 한순간을 마련해주는 것, 진심으로 그와 대화하려 시도하는 것이 결국 형사라는 업의 기본임을 이제는 알겠다.
형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해야 하고, 수사란 결국 사람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 기본을 지키지 않으면 그 어떤 변화도 시작되지 않을 뿐더러 기대할 수도 없다. p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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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형사들이 이런 사건 속에 뛰어들며 맞닥뜨리는 정서적 당혹감과 충격이 있다. 나는 후배들에게 이런 일을 어떻게 소화하고 견디라 해야 할지 아직도 적당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말없이 밥 한 끼 술 한 잔 사줄 뿐이다.
다만 스스로 이 정도의 결론은 내렸다. 희망 없는 일을 무수히 반복하는 시지포스처럼 매일 또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미고 있지만, 이렇게라도 단속하고 검거해야 우수죽순 더 뻗어나갈지 모르는 지옥을 한 뼘만큼이라도 좁힐 수 있다고. 내 일이 비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지라도 그것만으로도 내겐 이 일을 할 이유가 충분했다고.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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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는 성격 좋고 긍정적인 마인드에 정의감 넘친다고 자격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애정이 바탕에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아픈 사람, 억울한 사람을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없던 수사 실력도 찾아온다.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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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현장은 수십 수백 번을 봐도 담대해지기 어려울 정도로 매번 내상이 크다. 살인사건 현장보다 도리어 더 많은 영상이 각인될 때도 있다. 인간의 유약함, 환경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한계, 그로 인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죄와 벌을 직시하게 되기 때문일까. 타인이 내게 주는 고통도 무섭지만, 스스로 벌하고 단죄하는 고통이 더 처절해 보이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부검을 다녀올 때마다 생각한다. 오직 지금만이 나의 것이구나. 어제의 나, 내일의 나는 물론 바로 오늘, 잠시 후의 나조차 어찌될 지 알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진짜다. 죽음이 매 순간 곁을 맴돌지라도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당신도 부디 오늘은 살아 있어주길 바란다. 어제의 상처에 짓눌리지 말고 내일의 불안에 무너지지도 말고, 계속 지금 이 순간만은 살아 있자. p1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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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년는 이 사건을 해결하면서 월급만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자부심과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이때의 보람이 가슴 깊이 새겨져 그녀는 다가오는 고통을 이겨낼 힘을 비축하고, 현장을 쉬이 떠나지 못하는 형사가 될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그 어떤 직위와 명예보다 '담당형사'라는 이름에 큰 책임감을 느끼면서 하루하루 형사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런 형사의 첫 시작을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내게도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른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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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 자신을 기특하게 여길 일이 필요했을 때, 소매치기 두목과 기술자를 잡았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자주 내 일에 대한 성과와 보답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야 비로소 다음을 향해 넘어갈 수 있고 힘들어도 견딜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한다.
일의 고통을 이겨낼 힘도, 일하다 얻은 상처를 싸매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동력도 모두 일이 주는 기쁨과 슬픔 속에 있었다.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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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가 어렵고 험난할 때마다 형사의 몸엔 깊은 상흔이 남지만 마음엔 그보다 더 깊은 여운이 남는다. 현장이란 언제나 그 깊이가 짐작되지 않는 늪이고 절벽이어서 때론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무릎 꿇기도 하지만, 이렇게 해결할 수 있는 기쁨이 찾아오는 날에는 짜릿함과 보람을 만끽한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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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은 대중 속에서 무리지어 있기도 했지만, 개개인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보려는 자의 발목을 붙들었다. 이를 쉬이 탓할 수 없는 이유는 내 안의 편견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편견과 고뇌보다는 실제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범죄자와 맞닥뜨린 후부터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종잡을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 가늠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계속 살아내는 것이 결국 내 길임을 깨달았다. 한시도 두렵지 않고 언제나 충만하게 재미있어서 이 일을 계속한 것이 아니다. 비밀과 어둠을 품은 모든 사건과 현장과 범인은 언제나 두려웠다. 형사란 이 세상과 사람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자였다. 그 무엇도 속단하지 않고 만만하게 여기지 않으며, 끝없이 덮쳐오는 내면의 두려움조차 끌어안고 현장으로 나가는 것이 형사였다.
그후 사건이 계속 나를 훈련시켰다. 여전히 내게 들이닥치는 사건들은 매번 어렵고 두렵지만, 내 두려움을 다스리고 견디는 것까지가 형사의 업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건을 넘어 내 삶 속에 자리한 두려움을 직면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는 연습을 하고 있다. 형사로 살면서 내가 얻은 선물 같은 가르침은 삶에서도 유효했다. p19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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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은 자가 말 못하고 떠난 피해까지 찾아가면서 수사했고 범죄사실로 추가했다. 그러면서 형사들도 살인 사건만 해결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피해자의 고통을 절절히 느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범인이 제 생각과 한계에 갇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적는 조사가 되면 안 된다. 죽은 자가 말하지 못한 내용을 대변해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재판은 범인의 주장을 발표하는 장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말하지 못한 자의 말을 묻고 찾아내고, 그 말이 우리의 해석에 따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사실에 근거한 명료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범인의 자기확신에 찬 착각을 반론하고 무너뜨리고 대항할 조사방법을 의논했다. 담당형사도 그렇게 피해자가 살아가면서 남긴 흔적으로부터 죽은 자의 말을 찾아 억울함을 풀어가는 과정이 무엇인지 배워가고 있었다. (...) 어떤 자들은 꼭 자기 사고만큼의 언어로 한 사람의 생을, 나아가 세상을 더럽힌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어머님은 그 언론사들에 무섭도록 정확하게 항의하여 공개사과를 받아냈다. p26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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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같다." 아, 지난 시간을 전생같이 살 수도 있구나. 그래, 나도 이제 형사는 전생처럼 기억하고, 그 전생의 업을 지금 살아야 할 현생에서 또다른 방법으로 풀어보리라 마음먹었다. 흔히 갱년기라 말하는 시기를 '내 인생의 갱생기'로 정의하며, 체력이 재생 가능할 때 새로운 업과 삶의 도구를 찾고 만들어가는 것도 인생을 알차게 사는 방법이라 믿는다.
나는 여태껏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이제는 현장이 되기 전에 만남녀 살고자 한다. 마음 아픈 사람, 관계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책과 사람이 머무는 작은 공간도 만들었다. 그 공간을 채우고, 새로운 나를 채워가며 나는 지금 사회초년생의 자세로 살고 있다. p28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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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박미옥의 철학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다. 애정 없이 범인을 잡는 일에만 성취감을 느낀다면 형사가 아니라 사냥꾼이다.
앞서 30년 형사 인생이 '전생 같다' 했지만, 아니다. 사랑하고 노력하고 버티고 생각하는 한 나는 이번 생에서 늘 '형사 박미옥'일 것이다. p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