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다큐

[다큐] 살바도르 달리 - 불멸을 찾아서

릴라~ 2023. 8. 8. 18:52

어린 시절을 보낸 스페인 카다케의

태양과 바다, 암벽, 그 풍경에
미친 듯이 빠져들었던 소년이 있었다.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던 소년은
아주 일찍이 자신의 존재에 회의했다.
그의 부모는 그를 먼저 죽은 아들의 환생처럼 여기고
그에게 형의 이름 살바도르를 그대로 붙이고
먼저 간 살바도르와 그를 끊임없이 비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영향 때문이었을까
살바도르 달리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 눈에 띄는
특이한 기행을 일삼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형과 다르고자 했을 것이다. 시쳇말로 관종이다.
그의 도발적인 성격은 그의 미술 작품에는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달리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았다.
초현실주의 등 당대 새로운 조류를 받아들이면서도
달리는 그것을 한 번 더 뒤집고 비틀어
그가 재해석한 독창적인 풍경을
캔버스 위에 펼쳐놓는다.
꿈인지 현실인지, 머나먼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모호하고 기괴하고 신비스러운 그림들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그림은 우리 무의식 저편을 건드리면서
당혹감과 동시에 어떤 공감을 불러온다.
우리가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느끼게 해준다.
천재의 탄생이다.

다큐 '살바도르 달리'는 달리가 거주했던 공간을 중심으로

거의 전생애와 주요 작품을 훑어간다. 

그가 지역의 자연으로부터 기본적인 영감을 얻고

자신의 작업실을 설계하는 것을 비롯하여

공간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기에 

그가 생애 동안 머문 장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집중력 있고 달리를 이해하기에 좋았다. 

한 편의 다큐로 달리의 전생애를 조망할 수 있으며

그 생애의 면면에 가장 또렷한 자취를 남긴 것은 갈라와의 사랑이다. 

달리가 서른 살, 갈라가 마흔 살 때 둘은 결혼하고

평생을 함께 보낸다. 

 

하지만 이 다큐는 달리와 갈라의 갈등을 비롯하여

잘 알려진 사실 몇 가지를 다루지 않는다. 

갈라는 달리의 뮤즈였을까, 달리를 이용했을까. 

갈라가 그 누구보다 이 젊은 화가의 천재성과 발전 가능성을

알아보고 깊이 매혹된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갈라는 폴 엘리아르와 그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버리고

달리의 곁에서 애인이자 매니저로 평생을 보낸다. 

달리의 작품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가 갈라였다. 

그 대가로 엄청난 물질적 부를 누린 이도 갈라였고. 

 

그렇다면 갈라는 달리의 진정한 뮤즈였을까. 

갈라 덕분에 달리는 마음의 안정감을 얻어 작품에 전념할 수 있었을까. 

내가 잘 알 수는 없으나 평단의 평가에 의하면

달리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1930년대에서 40년대 초반에 나왔다. 

스페인 내전으로 달리와 갈라는 1948년 미국으로 이주하고

그 시기 달리는 그림 뿐 아니라 설치 미술과 영화 등으로 관심을 확장하면서

그야말로 인플루언서, 사교계와 미술계의 스타로 등극한다. 

그는 명성을 추구했고, 그 대가로 많은 부를 얻었다. 

그의 천재적인 감각으로 그는 세상을 놀라게 하고

다양한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지만

달리 생애 전체를 조망했을 때

그의 개성을 가장 또렷이 보여주는 작품들은

미국 활동 이전 시기라고 한다.

 

다큐는 달리의 뉴욕 생활, 이후 귀향하여 

다시 카다케와 피게레스에 정착한 이후의

작품 활동을 그의 관심사의 확장으로 다루고 있지만

나는 평단의 평가에 조금 더 공감하는 편이다. 

미국 생활 이전 작품이 훨씬 강렬하고 (대표적인 게 흐르는 시계를 그린 작품)

인간성에 대한 심오한 무언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후 작품은 팝아트 느낌이 강하기에 그런 듯하다. 

갈라의 얼굴을 넣은 성모마리아 그림이나 최후의 만찬은 내겐 그저 그랬다.  

물론 워낙 대가다보니 그 그림들도 밋밋하진 않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더 깊어지고 자신만의 철학적인 귀결을 보여준다거나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물론 이건 미술사를 잘 모르는 문외한인 내가 언급할 말은 아니지만. 

 

갈라에겐 물질적 풍요가 굉장히 중요했고

여든이 넘어서도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워서

달리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그런 갈라를 평생 의지하며 살았던 달리에게

약간의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탁월한 예술적 감각을 지닌 그 천재 화가가

정신의 한 면은 여전히 어린아이 같고

어린시절의 애정결핍을 메워줄 대상을 끊임없이 갈구했으며

죽음을 깊이 두려워했다는 사실에 연민을 느꼈다. 

이건 정말 소설에 불과하지만, 갈라와 헤어졌다면

어쩌면 달리는 말기에 그가 닿고자 했던

그가 찾고자 했던 무언가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까. 

성모마리아 갈라 대신에. 

더 성숙하고 깊어질 수 있었을까. 

하지만 달리에겐 갈라야말로 그가 만난 천국이었다. 

 

다큐의 마지막에는 인상적인 대사가 많았다.

달리의 평생의 친구는 뒤샹이나 달리 등의 예술가가 없었다면

20세기가 슬픈 시대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달리의 작품은 20세기로의 여행이고

20세기를 이해하기 위해 만나야 하는 작가가 달리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시대의 고정관념과 편견에 도전장을 내민 그 일련의 예술가들이 없었다면

20세기는 산업화와 대중문화 속에서 질식했을 수도.

 

달리의 생애를 조명한 다큐는 이렇게 끝난다. 

그는 시대에 지배되지 않고

시대를 압도했던 예술가라고.  

 

세계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그것을 표현해낼 수 있는 천재성을 함께 가진 화가, 달리. 

그는 그림으로 그가 만난 세계의 부조리와 비밀을 탐구했다. 

이 세계의 아름다움과 유한성과 비극과 숱한 어긋남을

그 자신의 방식대로 화폭에 새겨넣고자 했던 화가는

그 그림으로 불멸을 실현했다.

그의 영혼이 방황 속에서 삶을 마쳤는지 안식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그림은 불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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