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여름 / 알베르 까뮈 __ 까뮈의 젊은 날을 엿보다
우리 문학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정서는 '세계에 대한 찬미'이다. 식민지 이후 지금까지 근대가 고통으로 점철되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신의 축복이라 할 만한 태양이 사시사철 내리쬐는 풍요로운 지중해의 환경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날씨 뿐만이 아니라 자연의 색깔도 형형색색으로 다채로운 땅이니까.
그 알제(알제리)의 자연에 대한 순수한 경탄과 찬양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치 내게 그 곁에 있는 듯 묘사는 생생하고 감성은 풍요롭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거장의 필력을 아낌없이 느낄 수 있다. 특히 초반 에세이들은 까뮈가 20대 청춘에 쓴 글들이라 문장 곳곳에서 젊음의 열정이 짙게 배어 있다. 그곳에서 첫결혼을 했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알제의 바다와 바람, 언덕과 페허, 생에 대한 사랑. 그 모든 것이 '여름'이란 에세이에 함축되어 있다. 뒤이어 이어지는 다른 도시들에 대한 에세이도 흥미롭다.
그리고 책장을 덮으면 '페스트' '이방인' 등으로 잘 알려진 작가 까뮈의 내면에 좀 더 다가가게 된다. 이토록 생을 사랑했기에, 그것을 부정하는 모든 것들, 전쟁과 불의, 온갖 삶의 부조리와 정면으로 대결할 수 있었구나... 1차 세계대전 속에서 자라 이후 2차 세계대전을 모두 목격하면서 자기 시대를 정면으로 응시한 힘은, 바로 젊은 날 이 알제의 태양과 바다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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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티파사엔 신들이 머문다. 태양과 압생트 풀 향기 속에서, 은빛 갑옷을 두른 바다 속에서, 본연의 색으로 푸르른 하늘 속에서, 꽃들로 빼곡한 폐허와 돌무더기에 세차게 부서져 내리는 햇살 속에서 신들은 말을 건넨다.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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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곳에서 영광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것은 무제한으로 사랑할 권리다. 이 세상에 사랑은 오직 하나뿐이다. 여인의 몸을 부둥켜안는 것, 그 또한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그 기이한 기쁨을 자신의 몸에 새기는 행위다. 잠시 후 압생트 풀밭에 몸을 던져 그 향이 몸에 배게 할 때, 나는 모든 편견에 맞서 진리를 실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 그 진리는 태양의 진리이고, 또한 내 죽음의 진리일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내가 지금 내거는 건 다름 아닌 내 삶이다. 뜨거운 돌의 맛이 나는 삶, 바다의 숨결과 지금 울기 시작하는 매미들로 가득한 삶. 미풍은 상쾌하고 하늘은 푸르다. 나는 꾸밈없이 이 삶을 사랑하며, 이 삶에 대해 자유로이 이야기하고 싶다. 이 삶은 나의 인간 조건에 대해 자부심이 들게 한다. 하지만 흔히 들어왔던 말이 있다. "자랑할 게 뭐가 있어." 아니, 자랑할 것이 있다. 이 태양, 이 바다, 청춘으로 끓어오르는 내 심장, 소금 맛이 나는 내 몸, 노란 색과 파란 색 속에서 부드러움과 영광이 교차하는 이 광활한 배경. 이것들을 정복하기 위해, 내 힘과 능력을 다해야 한다. 이곳의 모든 것이 나를 본연의 나 자신으로 내버려 둔다. 나는 나의 어떤 부분도 포기하지 않고, 어떤 가면도 쓰지 않는다. p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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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밀라에 닿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곳은 지나다 들르거나 스쳐가는 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는 어느 곳으로도 이어지지 않고, 어느 고장에도 면해있지 않다. 그곳은 작정하고 갔다가 되돌아 나오는 곳일 뿐이다. 그 사멸한 도시는 구불구불한 길의 맨 끝에 자리해 길의 굽이마다 이제야말로 도시가 나타나리라는 헛된 기대감을 북돋고, 그런 만큼 더 멀게 느껴진다. 마침내 높은 산들 속에 파묻힌 퇴색한 언덕 위로 백골 숲 같은 누르스름한 뼈대가 불쑥 형체를 드러내고, 그렇게 제밀라는 오직 그것만이 우리를 세계의 고동치는 심장부로 이끌 수 있는 사랑과 인내라는 교훈의 상징이 된다.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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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과 바람의 난폭한 샤워는 나의 모든 생명력을 소진시켰다. 내 안에 겨우 이 어렴풋한 날갯짓, 신음하는 이 생명, 정신의 이 희미한 반항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제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기억을 잃고 나 자신도 망각한 나는, 저 바람이다. 바람 속에서, 나는 저 돌기둥들이고 저 아치이며, 저 뜨거운 포석이고 황량한 도시를 에워싼 빛바랜 저 산들이다. 이전까지 나는 나 자신과 거리를 둠과 동시에 세계에 현존하는 이런 기분을 결코 느껴본 적 없었다.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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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시와 나누는 사랑은 대개 은밀한 사랑이다. 파리, 프라하 같은 도시들은 자기 안에 갇혀 자기만의 특성으로 세계를 한정한다. 하지만 알제는 바다에 면한 몇몇 특혜 받은 도시들과 더불어, 입처럼 상처처럼 하늘을 향해 열려있다. 우리가 알제에서 좋아할 수 있는 건 누구나 누리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마주치는 바다, 무시 못 할 태양의 무게, 지역민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 그리고 늘 그렇듯 이 개방성과 무상의 선물 같은 접근성 속에서, 보다 은밀한 향기가 감지된다. 파리에선 무한한 공간과 새들의 날갯짓이 그리울 수 있다. 이곳 알제에선 인간은 적어도 충족되고 욕망을 보장받으며, 그렇기에 자신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헤아릴 수 있다.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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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수많은 지적인 사람들은 영혼의 불명성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진실인 육체를 그 진수까지 소진해 보기도 전에 거부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그들에게 아무 문제도 제기하지 않거나, 적어도 그들이 육체가 제안하는 단 한 가지 해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해답이란 육체는 썩어 없어질 것이란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씁쓸함과 고결함의 양상을 띤 진실을 감히 마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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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경은 내게 나의 사랑과 돌의 아름다운 외침 없이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했다. 세계는 아름답고, 세계를 떠나서는 구원이란 없다. 세계가 내게 끈기 있게 가르쳐준 위대한 진실은 정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심지어 마음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태양이 따뜻하게 데운 돌, 혹은 돌연 파랗게 드러난 하늘에서 우뚝 커져 버린 실편백나무는 '옳다'는 말이 의미 있어지는 유일한 세계를 한정한다는 것 또한 가르쳐주었다. 바로 인간들이 없는 세계 말이다. 이 세계는 나를 없애 무로 되돌린다. 나를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분노 없이 나를 부정한다. 피렌체의 들판에 내려앉는 이 저녁 속에서 나는 예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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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인색한 시대에, 헐벗은 나무들에, 세계의 겨울에 굴복한 것일까? 하지만 빛을 향한 향수 자체가 내가 옳다는 방증이다. 이 향수는 내게 다른 세상, 내 진짜 조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일부 인간들에게도 이 향수가 의미 있는 것일까?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나는 오디세우스의 항해 길을 그대로 밟아볼 예정이었다. 그 시대엔 가난한 젊은이조차 빛을 찾아 바다를 건너는 호화로운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들 하는 대로 따랐다. 뱃길에 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열린 지옥 문 앞에서 쿵쿵거리며 전진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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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이 의미하는 자유 없이 살아가는 것을 체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인간의 모든 손상은 일시적이며, 인간 전체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면 누구도 위하는 일이 아님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신화들 중 하나이다. 인간에게 빵과 히스가 절실한 상황에서, 빵이 보다 긴요하더라도 히스의 추억을 간직하도록 하자. 가장 어두운 역사의 한복판에서 프로메테우스의 인간들은 그들의 고된 직무를 멈추지 않으면서, 대지와 불굴의 히스에서도 눈을 떼지 않을 것이다. 결박당한 영웅은 신들이 내린 천둥과 번개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킨다. 그렇게 그는 그가 묶여 있는 바위보다 단단하고, 그의 간을 쪼아먹는 독수리보다 인내심이 강하다. 우리에겐 이 오랜 끈질김이 신들에게 맞선 반항보다 더 의미 깊다. 어느 것에서도 벗어나지 않고 어느 것도 물리치지 않으려는 저 경탄스러운 의지가 인간의 고통스러운 마음과 세계의 봄을 늘 화해시켰고, 앞으로도 화해시킬 것이다.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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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당신의 심장이 미지근하다면, 당신의 영혼이 초라한 짐승에 불과하다면 결단코, 가지 말기를! 다만 긍정과 부정, 정오와 자정, 반항과 사랑 사이에서 찢기는 고통을 아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바닷가의 모닥불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그곳엔 그들을 기다리는 불꽃이 있으니.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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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작품들은 대체로 그가 느끼는 향수나 유혹의 역사를 되짚는 것이지, 실제 자신의 이야기인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자전적임을 내세우는 이야기일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어떤 작가도 감히 자신을 곧이곧대로 묘사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나는 최대한 객관적인 작가가 되고 싶다. 내게 객관적인 작가란 절대 자신을 글감으로 삼지 않고서 주제들을 정하는 작가다. 하지만 작가를 그의 작품의 주제와 혼동하는 이 시대의 집착은 작가에게 상대적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부조리의 예언자가 된다. 나는 내가 사는 시대의 길거리에서 찾은 생각을 고찰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나의 모든 세대와 함께 그 생각을 키워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나는 그 생각을 다루고 그것의 논리를 규정하기 위해 필요한 거리를 두었을 뿐이다. 이후에 내가 썼던 모든 글들은 그 사실을 충분히 드러낸다. 하지만 활용하기 편한 것은 아무래도 뉘앙스의 차이보다는 공식이다. 사람들은 공식을 택했다. 결국 나는 예전처럼 부조리하다.
그러니 내가 관심을 갖고서 때로 글까지 쓰는 경험을 했던 부조리가, 아무리 그 부조리의 추억과 감동이 이후에 이어지는 나의 사유에 수반된다 하더라도, 오직 출발점으로서 간주될 뿐이라고 한 번 더 말해본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절망의 문학이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절망은 침묵한다. 침묵조차 두 눈이 말을 하는 한, 어떤 의미를 지닌다. 진정한 절망은 단발마, 무덤, 혹은 심연이다. 절망이 말을 하고, 추론하고, 무엇보다 글을 쓴다면, 그 즉시 형제가 손을 내밀고, 나무가 정당화되고, 사랑이 싹튼다. 절망의 문학은 용어 자체로 모순이다. p156-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