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역사, 인물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 / 박노자

릴라~ 2024. 11. 30. 11:57

도서관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눈에 띈 책. 예전에 한동안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의 책에 몰두한 적이 있기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 오, 이건 내가 잘 모르는 주제인데?

 

박노자 선생의 책은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읽는 편이다. 김구 선생을 극우 테러리스트로 취급한다던가, 민족주의에 대한 과도한 알레르기 반응 등이 있어서. 물론 서구 강대국이나 일본처럼 제국주의와 결부된 민족주의의 폐해를 모르는 바 아니나, 우리나라는 근대국가 성립 과정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제대로 된 민족주의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므로. 박노자 선생은 미국을 예로 들며 민족이 없어도 국가 성립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미국은 300년밖에 안 된 나라라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좀 더 긴 세월이 흘러봐야 알고... 또 다문화국가라 해도 기득권층은 백인 청교도라는 뿌리가 있는 나라다.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자기들 나름의 정체성을 구축하기도 했고. 

 

암튼 그의 견해에 다 동의하진 않지만, 학자로서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학문적 성과를 이렇게 쉬운 글로 쓰려면 굉장한 내공이 필요하므로. 인물들의 열전은 자칫 고리타분, 재미없어지기 십상인데 이 책은 진짜 잘 읽혔다. 정말 유려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한 인간의 생애를 요약하면서도 그의 사상적 궤적까지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으니... 

 

책에서 소개하는 조선의 사회주의자들, 신남철, 박치우, 임화, 김명식, 남만춘, 김남겸, 최성우, 양명, 한위건, 허정숙 중에서 내가 아는 이는 단 두 명, 임화와 허정숙밖에 없었다. 그들은 온 생을 바쳐 조선의 독립과 미래를 고민했으나 대부분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소련이 보수화되면서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거나 총살되었고, 나머지는 북한에서 이루어진 연안파 숙청 때 사라졌다. 사회주의 안에서도 이념 차이로 분파를 만들어 갈라지는 모습은 안타까웠지만(우리 독립운동의 한계 중 하나지만), 그들의 천재성과 헌신과 열정이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흩어지고 부서지는 모습은 더욱 안타까웠다. 20세기 초반, 새로운 사상을 접한 근대 지식인들의 사상적 궤적과 삶의 행로를 훑어보게 해주는 책이다. 

 

저자의 견해 중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지점이 있었다.

 

"가령 남한의 우파들은 지금도 주권과 민족국가의 완성, 즉 평화적이며 동등한 남북 통일과 같은 사안에 별반 관심이 없습니다. 조선의 부르주아들이 근대적 민족 만들기에 있어서 그 능력이 부족했는데, 이런 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 보니 통일 문제는 여전히 좌파들의 과제로 남아 있지요."p119

 

아니, 이런 혜안이라니. 그렇다. 민족 공동체를 강조하는 건 우파인데, 대체 우리나라 우파들은 하는 게 뭐가 있는지? 우파가 제대로 된 우파 노릇을 못하고 양아치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박노자 선생의 말처럼 태생적으로 그러했기에 지금까지도 그러한 건지도 모르겠다. 좌파가 통일 이야기하면 맨날 빨갱이 어쩌고 공격하기에, 영국의 처칠이나 프랑스의 드골처럼 우파에서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와서 통일의 기반을 닦아야 하는데, 이 책을 읽고 알았다. 우파에서는 그런 인물이 못 나오겠구나... 에혀...

 
휴직한 지가 벌써 몇 달째인데 최근에야 도서관을 방문해 오랜만의 독서 중... 가을에 날씨가 좋아 그냥 사부작대다가 날도 추워지고 갈 데도 없고 이제사 책을 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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