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 위화
위화 작가의 책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국 현대사, 격변기라는 말로는 부족한, 그 어마무시한 광풍을 배경으로 그 시대적 고난의 한가운데를 헤쳐가는 개성 또렷하면서 인간미 넘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대단한 흡입력을 가지고 독자를 매혹한다.
위화 작가의 책은 한 번 책장을 들추면, 다음 날로 미루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끝을 봐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예전 지하철에서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펼쳤다가 내리는 역을 두 번이나 놓친 적이 있고, 어제는 새벽 1시 반에 가까스로 책장을 덮었다. 여운 때문에 2시 반까지 못 잤고. 어떤 중요한 일도 내 잠을 방해하지는 못하는(시험이고 발표고 뭐고 잠부터 잔다) 잠순이인 내가!!
어느 인터뷰에서 본 일이 있는데, 위화 작가는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읽고 저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한다. 통속소설로 분류되지만 너무 좋은 소설이라고.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면, 진짜 재밌지. 중학교 때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아마 당시 대여섯 번은 다시 본 것 같다. 지금은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재미있다는 그 감각은 잊혀지지 않는다. 언제 다시 한 번 봐야지 싶다.
소설 '원청'의 배경은 청나라 말기, 중화민국 초기이다. 말 그대로 무정부 상태로 각 지역마다 군벌이 활개를 치던 시대로 알고 있는데, 소설을 보면 뭐 정부군도 이게 군대인지 약탈자인지 비적과 그다지 다를 바 없던 시대였다. 법은 실종되고 잔학한 무도배가 설쳐대며, 그 누구도 백성들을 지켜주지 않던 대혼란의 시대이자 며느리를 쉽게 쫓아내는 등 남존여비의 관습이 여전히 사람들을 짓누르는 시대기도 했다.
그런 시대에 고향을 떠난다는 건 목숨을 내놓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주인공 린샹푸는 원청이라는 도시를 향해 기약 없는 먼 길을 떠난다. 그것도 젖먹이 딸을 안은 채로. 아내를 찾겠다는, 딸에게 엄마를 찾아주겠다는 집념 하나로 북부 지방에서 말도 잘 안 통하는 양쯔강 아래 600리 도시를 향해. 어쩌면 그는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샤오메이가 왜 그를 떠났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는 인생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 안정된 기반이 있었던 소중한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샤오메이와 아청이 먼저 그러했듯이.
아무리 남으로 가도 원청은 나타나지 않았고 말씨는 점점 달라졌다. 결국 린샹푸는 샤오메이와 같은 사투리를 썼던 도시, 시진으로 되돌아간다. 눈보라가 무섭게 치는 날, 시진에 살던 샤오메이와 아청이 성황당에 갔다가 동사하던 그날, 린샹푸는 시진에 도착한다. 린샹푸는 동냥젖을 먹이며 여정을 계속했는데, 아이에게 젖을 준 천융량 내외는 바깥 날씨를 염려해 린샹푸를 머물게 하고 그렇게 둘은 의형제가 되어 린샹푸는 시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뛰어난 목공 기술을 갖고 있던 린샹푸는 천융량 일가와 함께 시진에서 다시 기반을 잡아가고 상인회 회장 구이밍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맺는다. 사업은 번창하고 그의 딸 린자오바이와 천융량의 아들들은 사이좋게 자라나지만, 토착 비적 즉 토비들이 들이닥치면서 시진에는 위기가 닥친다. 장도끼 일당 등 토착 비적들의 무도함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희생되는 와중에서도 천융량의 아들 천야오우는 목숨을 걸고 린자오바이를 구해내고, 비적 중에서 마음이 고운 스님은 천야오우를 구해낸다. 훗날 스님은 천융량과 의형제를 맺어 장도끼를 몰아내다 죽지만 천융량은 스님의 어머니를 자신의 집에 모신다. 린샹푸는 구이밍을 구하러 가다가 목숨을 잃지만, 고향에서 그의 땅을 돌봐주던 톈다 형제들이 그 머나먼 길을 찾아와 그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반한다.
소설을 읽으며 계속 울컥 하는 이유는 샤오메이와 린샹푸, 린자오바이와 천야오우 등 헤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주인공들의 운명이 먹먹했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시대의 잔혹함과 대비되는 주인공들의 지극한 우정 때문이었다. 중국 서사 문학의 멋진 점 하나가 삼국지의 도원결의처럼 천하를 경영하는 영웅들이 맺는 우정 이야기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 시대 평범한 백성들이지만 천융량 일가, 톈다 형제들, 구이밍 등이 보여주는 우애는 참으로 고상하고 드높은 것이어서 영웅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건 또다른 종류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이런 우애와 의리는 한국 문학에서는 좀 보기 드문 것이기도 하다. 드넓은 대륙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 방편으로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맺는 신의와 우애를 중시하고 그런 문화를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린샹푸도, 천융량, 구이밍, 톈다는 목숨을 걸어서까지 우의를 지켜내고, 샤오메이도 딸을 잃으면서까지 끝내 아청을 버리지 않는다. 린샹푸는 끝내 샤오메이를 만나지 못했지만, 샤오메이의 고향 시진에서 딸을 키워내고, 끝까지 신의를 지키는 삶을 살았다. 린샹푸는 죽는 마지막 순간에 미소를 짓는다. 그는 원청에 가지 못했지만 긴 시간이 흐르면서 샤오메이에게 일어났을 피치 못할 일을 이해할 나이가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샤오메이의 마음에 가닿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결국 원청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가는 친절하게도, '또 하나의 이야기'라는 챕터로 영화의 프리퀄처럼 샤오메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위화 작가는 특기가 유머인데, 이 소설에선 그런 색채가 조금 약하다. 유머보다는 이별의 비애로 가득한 소설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안타깝고 먹먹하고... 만나고 싶은데 결코 만날 수 없고, 원청에 가야 하는데 결고 가닿을 수 없으니... 삶의 가장 큰 아픔이 이별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이다. 그것은 낡은 관습 때문에, 시대적 혼란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연이어 벌어진다. 그러나 그 이별이 인간의 의지를 무너지게 하지는 않는다. 원청에 닿지는 못했지만 원청을 향한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서로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켜낸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한 시대에 분명히 실재했던 그런 인간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다음 세대는 전혀 다르다고. 너 죽고 나 살자라고.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면, 이 소설의 전체적인 인물 구도이다. 인물들의 선택과 행동이 깊은 감명을 주는 동시에 잔혹한 토비들을 제외한 인물들이 대체로 선하게 등장해서 역사소설보다는 약간 동화나 환타지 같은 느낌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위화는 언제 노벨상 타도 이상하지 않은 대작가라고 생각하지만, 왜 스웨덴 노벨상 수상위원회가 한강 작가에게 노벨상을 주었는지도 알 것 같다.
위화 작가의 소설에는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검열이 심한 중국 문단의 분위기 때문인지, '몽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소설을 쓰고 싶어한 위화 작가 개인적 취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위화 작가가 좀 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이라면 한강 작가는 훨씬 개인적이고 독창적이다. 한강 작가의 책에는 고뇌로 몸부림치는 개인이 등장한다. 그것이 독서를 좀 힘들게 하지만, 독창적인 내면 묘사와 함께 독창적인 서사 구조가 이어진다. 노벨상 수상 위원회가 '시적 산문'이라 명명한 그 독창성에 나도 좀 더 점수를 줄 것 같다. 뭐, 대작가들의 작품을 일개 소시민인 내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그래서, 원청 다음으론 십 년 전에 읽었던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드디어 다시 볼까 싶다. 한 번도 겨우 읽어서 두 번 읽으리라고는 엄두가 안 났는데, 원청 보고 나니 갑자기 읽고 싶어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