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 3각
고등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교내 체육대회를 앞두고 선수를 뽑기 위해 학급회의가 열렸다. 실장이 앞에 나와 지원자를 받고 있었다.
늘 내게 부담을 준 체육대회, 초등학교 시절 난 몸이 많이 약해서 달리기를 지독하게 못했다. 못했기 때문에 싫어했다. 꼴찌에서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운동회 날, 6명씩 한 조가 되어 전교생이 모두 뛰는 시간은 내게 고역이었다. 5학년 때였던가. 나는 담임 선생님께 몸이 아파 못 뛰겠다고 거짓말하고는 달리기를 빼먹은 적도 있다.
중학교 때, 우리 학교는 한 반에서 약 60퍼센트 이상의 학생이 선수로 뛰어야 할 만큼 다양한 종목이 있었지만, 3년 내내 나는 한 번도 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못하면 우리반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꼴찌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책상 앞에는 사회과 부도에서 오려낸 세계지도와 함께 <꽃들에게 희망을> 맨 앞 장에 나오는 '보다 충만한 삶, 진정한 혁명을 위하여'라는 글귀가 늘 붙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아주 내성적이고 얌전한 학생이었다. 겁이 많고 소심했다. 내성적인 학생이 흔히 그렇듯이 마음은 우주까지도 날아갔지만,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참여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이 조금쯤은 모순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이 내 학창 시절의 마지막 행사이다. '2인 3각은 누가 할래'라는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망설이다 손을 들었다.
당시 대부분의 학교가 그랬듯이 우리 학교도 야간 자습을 했다. 저녁 먹고 어스름이 질 무렵, 우리 팀은 연습을 했다. 꼬박 일주일 동안. 우리 학교는 트렉 안이 잔디밭이었는데, 가을이라 잔디가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우리를 감쌌다.
발을 맞춰 뛰고는 함께 잔디밭에 누워 어두워가는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의 느낌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은 어찌나 넓은지, 하늘만큼 내 가슴도 열리는 것 같았다. 야자 시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종이 치면 아쉬운 마음을 안고 교실로 돌아가곤 했다.
처음에는 발이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이 끝나갈 무렵, 짝궁과 나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혼자 뛰는 것과 같은 속도로 아주 신나게 운동장을 돌았다.
드디어 체육대회 날, 우리 팀은 결승에서 거뜬히 1등을 차지했다. 연습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꼴찌를 했더라도 나는 기뻤을 것이다. 중요한 건 '과정'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배웠던 것 같다. 내 마음 속에서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것은 전에 알지 못햇던 어떤 '생기', 교실에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마음의 생기였다.
올 가을 교내 체육대회에서 아이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니, 한참 전의 그 작은 사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작고 작은 일들이야말로 우리를 변화로 이끄는 초대장임을 깨닫게 된다.
학창 시절 이후 내 삶에 일어난 변화들을 살펴보노라면, 그 길을 이끈 건 작은 관심과 주의, 계기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내 마음 깊이 흔적을 남긴 깊고 진실한 체험도 많지만 거슬러가면 그것 역시 아주 작은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작은 것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우리는 낡은 길에서 새로운 길로 접어든다. 그러기에 어쩌면 유치해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작은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삶이 우리 마음 속 소망을 구체화하는 것이라면, 꿈이 현실로 바뀌는 지점도 바로 작은 일들을 시도하는데 있으리라.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흘려 보낸다면 우리들의 꿈은 결코 현실이 되지 못하리라.
매년 수천만의 어린이가 굶어 죽어가는 이 세계를 당연시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묻는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냐고. 불가능하다고. 그러나 작은 것의 가치를 보기 시작한다면 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하리라. 우리가 있는 가정과 학교에서, 사랑과 평화를 창조할 수 있는 작은 실천들. 친구에게 건네는 인사 한 마디에서부터.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가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지 먼 훗날 저절로 되는 법은 없다. 어느 누구도 하루 아침에 큰 용기와 사랑을 지니게 될 수는 없으리라. 작은 일을 함으로써 보다 큰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생기는 것이리라.
순간순간 우리 마음을 열어주는 작은 일들을 거듭 시작하고 지속할 때, 삶은 자신과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해가는 긴 여행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자주 말하면서도 우리 가슴 속에는 갖고 있지 않은 것, 우리가 '희망'이라고 부르는 그것과 만나게 되지 않을까.
- 2000. 가을. 학교 소식지에 실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