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다큐
다큐 - 오래된 인력거
릴라~
2012. 3. 1. 15:39
이성규 감독이니까 찍을 수 있는 영화였다. 십여 년에 걸친 그의 인도 여행과 주인공 샴린과의 개인적 친분 때문에 샴린의 삶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샴린은 여행자들 사이에 무척 유명하다고 한다. 몇 년 전 캘커타에 갔던 친구 J는 샴린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착실해서 한국 여행자들이 그의 릭샤를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13명의 식구들을 거느린 가장 샴린, 아내는 원인 모를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열심히 공부해 성공할 것을 기대했던 큰아들은 돈이 없어 학업을 중단하고 집을 나갔다. 샴린에게 주어진 기회는 오직 인력거를 끄는 것. 그는 힘듦을 기꺼이 감내하고 그것을 기쁘게 진다. 인력거는 그에겐 신성한 것이었으며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의 꿈은 돈을 모아 오토릭샤를 사는 것. 하지만 나날이 깊어가는 아내의 병원비로 그가 모아놓은 돈뭉치는 성큼성큼 사라져간다. 오랜 기간 돈을 그렇게 모으지 말고 처음부터 아내를 위해 썼으면 하는 생각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다하다 안 되어 캘커타의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알게 된 아내의 병명은 정신병이었고 결국 입원하게 된다. 처음부터 깊은 우울증으로 보이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아 안쓰러웠다.
다큐에는 샴린이 보살펴주는 젊은 청년 라노즈도 등장한다. 늘 말이 없는 라노즈의 비밀이 영화에서 밝혀지는데 그가 어릴 때 그의 아버지는 비하르 지방에서 불가촉천민들이 지주에 대항하여 일으킨 시위 도중 무참하게 살해된다. 그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고 힘 있는 자들을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인력거꾼 생활을 견디지 못한 마노즈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인력거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최하층민인 비하르 지방의 사람들이 주로 종사한다. 그나마 이제는 만 여대밖에 남지 않았으며 인도 정부는 이것이 반인도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철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인력거는 인력거꾼의 소유가 아니며 소유주에게 빌려서 사용하는데 쓰다가 고장나면 모두 인력거꾼이 고치거나 배상해야 한다. 그들은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 자리를 차지하는 공동 숙소에서 생활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보며 인도가 없애야 할 것은 인력거가 아니라, 그들에게 인력거 이외의 기회를 주지 않는 뿌리 깊은 가난과 카스트의 고리로 보였다. 인력거를 향한 샴린의 애정은 한편으로는 애틋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처연했는데,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노동에 대한 예찬으로 읽는 모든 독해에 반대한다. 더 인간적인 노동의 기회가 주어져 있지 않은, 인력거에 매여 있는 그의 삶의 구조가 마음 아플 뿐. 샴린의 큰아들은 대도시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플 때 가불한 약값이 이자가 붙어 큰 빚을 지고 있었고 샴린은 아픈 아들을 집으로 데려올 수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샴린이 인력거를 끌며 골목으로 달려가는 장면)과 마지막 대사(그는 오늘도 가족의 희망을 지고 인력거를 끌고 있다)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있었다. 이 부분이 좀 더 개성적이었다면 대작이 되었을 것인데, 너무 평이하게 처리된 듯하다. 샴린의 삶의 면면에 깊숙이 다가가는 점과 감독의 화면 구성 솜씨는 최고지만(오랫동안 TV 다큐 작업을 해온 감독이라서 여느 다큐와 달리 화려한 질감의 화면을 선보인다), 캘커타 인력거꾼의 삶에 대한 작가의 관점은 평범한 편이고 그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행만으로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캘커타 서더스트리트에 실제하는 삶의 조각 조각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 감동적인 영화다.
|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