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 어머니
자신의 온몸에 불을 지르고 죽어가던 한 청년이 어머니를 애타게 찾는다. 그리고 자신의 부탁을 꼭 이루어달라고 어머니에게 몇 번이나 소리친다. 어머니는 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꼭 네 소원을 이루겠다고 답하고 아들을 떠나보낸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다.
영화 <어머니>는 이소선 여사가 돌아가시기 약 이년 전부터 촬영되었다. 작년에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분의 마지막 근황에 대한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영화는 이소선 어머니의 일상을 따라가면서 40여년 전 어머니와 아들의 마지막 장면을 실험 연극으로 표현하는 배우들의 이야기를 함께 보여줌으로써 어머니의 삶을 바라보는 제3자의 시선을 담으려 했다.
'노동자의 어머니'란 호칭이 부담스럽지 않냐는 감독의 질문에 어머니는 답한다. 노동자(전태일)의 어머니가 맞는데 뭘 그러냐고. 일상을 살아가는 어머니의 표정과 태도는 평화로웠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의 평온함이었다. 하지만 연극 연출자 왕모림(대만)의 질문에 따라 아들의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어머니의 음성은 격해진다. 어머니가 직접 표현하는 그때 그 순간은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전태일 열사의 무덤 앞에서 해마다 찍은 어머니의 사진이다. 젊고 앳된 여성의 모습에서 중년을 거쳐 할머니가 된 사진들이 흘러가는데 긴 설명 없이도 그분의 지난 생애를 느낄 수 있었다. 평생을 아들과 함께 해온, 아들의 유지를 받들어온 삶이었다. 40년을 노력했는데 아직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지 못했다는 어머니의 말은 그래서 긴 메아리를 남긴다.
자그마한 체구에,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한 여인이 아들의 뜻을 좇아 한평생을 바쳐온 삶은 그 어떤 영웅담보다도 우리 마음에 스며든다. 모든 노동자들을 자기 자식처럼 품어온 삶이었다. 수감될 때는 청년들에게 다 자신이 시킨 것이라고 이야기하라며 혼자 감옥에 갇혔다 한다. '어머니'란 이름이 이렇게 꼭 어울리는 분이 있을까. 겉모습은 어려운 시절 고생하며 살아온 평범한 할머니지만 또렷한 눈빛과 시대와 세상에 대한 분명한 지향점이 이분에게 특별한 아우라를 부여한다. 다시 뵙지 못할, 한 시대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다.
영화의 끝머리에는 이소선 어머니가 집회에 초대되어 잠깐 연설하는 장면이 나온다. 겁내지 말라고, 함께 힘을 합치면 못할 것이 없다고, 하나가 되면 이길 수 있다고,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고 힘있게 이야기한다. 평생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꿨던 이소선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 같았다. 그 메시지는 두려움 없는 '용기'였다.
태준식 감독은 불안한 상태에 있는 젊은 친구들, 심신이 지친 운동권들, 386들 모두가 이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가 보여주는 '용감한 삶'이 주는 위로와 격려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되리라. 어머니는 가셨지만 그분이 전하는 진심어린 격려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