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영화, 드라마

폭풍의 언덕 — 바람처럼 우리를 휩쓴 사랑

릴라~ 2012. 8. 18. 09:54

 

 

 

두 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요크셔 황야 위로 불어오는 바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맞았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격정적인 사랑도 그 바람의 일부로 느껴질 만큼 이 영화가 시종일관 그려내는 건 스산하고 황량한 '폭풍의 언덕'의 풍광과 그 언덕 위를 떠돌던 두 사람의 혼이다.

 

 

 

영화는 에밀리 브론테의 원작과 달리 캐시가 죽는 부분에서 끝이 난다. 캐시를 떠나보낸 히스클리프가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홀로 풀숲을 허위허위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주제를 압축해서 보여주었다. 시작도 끝도 없이,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그 뱡향을 가늠할 수 없었던, 사랑의 거센 소용돌이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빨려들어갔던 두 사람의 이야기. 고통이 세월에 따라 바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의 깊이만큼의 그림자를 새겨넣은 히스클리프의 얼굴은 마지막 장면에서 불어오는 바람 사이를 걸어가며 담담함으로 바뀌어간다. 마치 그 바람 속에서 캐시의 영혼을 느낀 듯이.

 

 

 

"네가 편히 눈을 감을지라도 너가 없는 곳은 나에게 지옥이야." (히스클리프)

 

"그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그가 곧 나인데." (캐시)

 

 

 

이런 대사를 신파조나 감상주의적 뉘앙스 없이 거뜬히 내뱉을 수 있는 캐릭터가 많지는 않으리라.  자신이 사는 곳을 벗어나본 적 없는 젊은 여성 작가가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이같은 쓸쓸함과 격정을 길어올렸다는 점이 신기하다. 고전이 전하는 감동은 이런 것이다. 후기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두뇌만 커지고 얄팍해진 가슴과는 다른 무엇. 잔꾀 부리지 않고, 비극을 예감하면서도 자신의 진짜 감정과 절대 타협할 수 없었던,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주인공들의 삶의 행로가 어떤 숭고함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서사를 친절하게 보여주지 않지만 우리 마음속에 요크셔의 안개와 바람을 새겨넣어준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며 서로를 결코 놓을 수도 잊을 수도 없었던 히스클리프와 캐시의 내면의 떨림을 전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히스클리프는 고아였고 캐시 역시 아버지를 일찍 여읜다. 이들의 내면에 자리한 결핍감이 서로를 향한 특별한 유대를 만들어내었다고 볼 수 있다. 따스하고 친절하고 연민에 가득찬 부드러운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파괴하면서까지 상대의 모든 것을 요구하는,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끌릴 수밖에 없는 그런 동물적인 사랑. 히스클리프를 흑인으로 설정한 점은, 매일의 고통을 견디는 힘을 주었으나 결코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없으며 그의 가슴속에 감추어둘 수밖에 없었던 좌절된 사랑의 절망감을 배가시켜 주고 있다.

 

 

 

히스클리프는 이 세상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을 꼭 닮은 상대방의 가슴 한복판에서만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캐서린에 대한 갈구가 그처럼 깊고 아플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이런 종류의 사랑, 회오리바람처럼 우리를 덮쳐와서 우리의 의지로는 거부할 수 없는 그런 뜨거운 감정을 온전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이십대에만 가능할 듯 싶다. 네가 없는 곳이 지옥이었던 시절. 사랑이라기보다는 격정에 가까운.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우리들의 영혼이 무언가를 찾아 '바람' 처럼 떠돌았던, 잊고 있었던 우리 마음속 워더링 하이츠를 다시 찾아가는 여행이다.

 

 

 

그 워더링 하이츠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안개 자욱한 언덕과 그 언덕 위를 몰아치는 바람과 그 바람속을 함께 거닐었던 누군가의 존재가 살며시 나타난다. 그 시절의 너와 나의 존재가 지워지고, 우리 모두를 휩쓸고 갔던 '폭풍우'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지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은 그 언덕에 불어오는 '바람' 뿐이리라.  

 

 

 

 


폭풍의 언덕 (2012)

Wuthering Heights 
6.7
감독
안드리아 아놀드
출연
카야 스코델라리오, 제임스 호손, 스티브 에베츠, 올리버 밀번, 니콜라 벌리
정보
로맨스/멜로 | 영국 | 129 분 | 201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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