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침묵>, 하느님의 신비를 사는 이들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신문에 뉴스에 온갖 커다란 목소리들이 우리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세상 속에서, 아주 낮은 곳에서, 아주 작은 속삭임으로, 부드러운 미풍처럼, 깃털처럼 조용히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그들을 향해 현실의 어려움을 피해 편안히 살아가는 '현실 도피'의 삶이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이 극도의 고행을 요구하는 힘든 삶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런던 노팅힐 갈멜 수녀원의 수녀님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것은 가장 리얼한, 현실적인 행위이며, 자기 자신을 직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그리고 그러한 삶은 부르심을 받은 이라면 누구나 따를 수 있고 걸어갈 수 있는 그런 길이라고.
'하느님은 살아계시다'를 서원으로 삼은 갈멜의 수녀님들은 하루 일과를, 일평생을, 관상과 침묵, 노동으로 보내며 하느님의 사랑을 맛보고 느끼고 그 사랑에 헌신하는 데 자신을 바친 이들이었다. 자신들의 삶이 바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현현임을 인식하면서, 너무 바쁘고 힘들어 기도할 수 조차 없는 이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은 분들이었다. 죽음이 가끔은 두렵지만, 노수녀님들의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그것에 경외심을 품게 된다고, 그것 또한 삶의 신비라고 말하는 맑고 따스한 분들이었다.
원장 수녀님은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오롯이 바칠 수 있는 삶을 찾아서 갈멜에 입회했다고 한다. 죽음 뒤에 아무 것도 없다는 무신론자들이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자신의 직관이 옳다면 또 다른 세계를 볼 것이라고 가볍게 이야기하셨다. 하느님은 이 생명이 이대로 끝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을 그리 대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삶은 그 삶 너머를 향하는 지평 속에서 그 온전한 모습이 드러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또 다른 수녀님은 시구를 인용하며 죽음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설명하셨다. "선하신 분의 손을 잡고 살아왔나이다. 진하고 향기로운 잔을 가득 마시며." 이 시구를 읊을 때 수녀님의 표정과 목소리가 너무 온화하여 괜히 눈물이 났다.
이분들 모두 신에 대한 모든 개념과 형상과 관념들을 버리게 되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한 영혼의 '어둔 밤'을 지나서 삶의 '신비'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 즐거움도 기쁨도 살아가는 의미도 느낄 수 없는 그런 고뇌의 시간을 거쳐왔다고. 그것은 대개 몇 년이지만 원장수녀님께는 18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고 했다. 이후에야 자신이 신을 오해했으며, 세상에 대한 자신의 그릇된 관념들을 버리게 되었노라고 그분은 말했다.
이 영화는 마이클 화이트 감독이 런던 한복판, 자신의 집 건너편에 있는 갈멜 수녀원의 종소리에 호기심을 가지고 수녀님께 다큐를 만들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한 후 오랜 기다림 끝에 허락을 받아서 일 년간 촬영했다고 한다. 수녀원 측에서는 처음엔 망설였으나 현대의 미디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촬영을 허락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다큐 중간중간에 나오는 수녀님들의 인터뷰다. 이 영화가 아니고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목소리이고 들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성주간과 부활절을 앞두고 두 분 수녀님이 노래 연습을 하는 장면이다. 그 두 분의 화음은 세속의 사람은 낼 수 없는 소리였다. 동정을 지키며 깊은 침묵과 명상 속에 살아온 분들만 낼 수 있는 천상의 소리. 함께 영화를 본 부모님들도 정말 '천사의 소리'가 따로 없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소리였다. 어떤 악기도 인간 내면의 심원한 곳에서 울려나는 소리의 아름다움엔 비할 수 없을 것 같다. 산과 강과 바다의 소리도 한 인간의 깊은 고뇌와 환희로부터 끌어올려진 그 소리엔 비할 수 없으리라.
우리가 현실적인 것이라고, 리얼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과연 진정 리얼한 것일까. 망상이고 착각이고 오해가 아닐까. 그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분들이 자신의 심장 한복판에서 들은 노래는 세상에 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속삭임, 우리 자신의 영혼과 인류의 몸과 이 세계의 신비가 맞닿아 있는 곳에서 울려나는 가장 리얼한 속삭임에 귀기울이고 그 속삭임을 삶으로 증언하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모든 존재를 위해 기도하는 분들. 가장 크고 높고 위대한 소리는 침묵임을, 그 침묵은 인간적인 사랑을 넘어선 '신적인' 사랑의 증언임을 잔잔히 보여주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