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신학기 업무분장이 발표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울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다른 학교 같으면 전 해가 아무리 힘들었더라도 신학기에는 약간의 설렘 같은 게 있기 마련인데, 이 학교에서 2년을 보내고나니 두려움과 막막함이 앞섰다. 작년에 3명을 자퇴시키면서 얼마나 진을 뺐는지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감정까지 말라버린 기분이었고, 어떻게 또 한 해를 시작하나 가슴만 답답해왔다.
학생들보다 내가 더 어려움을 느낀 것은 이곳의 조직 풍토이다. 다른 학교에서는 비록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할지언정 문제 그 자체에 대해서는 동료들과 충분히 교감할 수 있었는데, 이곳 전문계고의 분위기는 매우 특이하여, 다들 눈감고 문제 그 자체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관리자 및 일부 부장교사들은 그저 '열심히 하면 다 된다'는 긍정성 발언만 앵무새처럼 내뱉고 있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공대 출신들은 사고방식이 다 그런지, 아니면 교육학적 안목의 부재인지, 그저 공장을 돌리듯 이곳을 별탈없이 돌리면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다른 학교에서는 되는 일인데 왜 여기만 문제를 이런 식으로 풀어가냐는 물음에 이곳 분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마음을 비워라.' '왜 그렇게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나,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도 많지만 충분히 바꿔갈 수 있는 작은 일들도 많은데 뭘 마음을 비우란 말인지. 즉 그분들의 말인즉, '현실'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문제라는 것이다. 열 가지 다른 이야기에 한 가지 같은 대답(마음을 비우라는)만 돌아오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이 책 <긍정의 배신>은 긍정적 사고가 어떻게 우리들의 사고 능력을 마비시키고 현실을 외면하게 하는지 개인적 차원 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다각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이란 나라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긍정적 사고의 전도사들이 어떻게 청교도주의를 대체하면서 기업과 종교, 심리학계를 장악해왔는지 그 과정에 대한 사회역사적 분석이 재미있다. 근검과 노동을 강조하는 청교도주의(특히 칼뱅주의)와 밝음과 부를 강조하는 긍정적 사고는 일면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묘한 일치점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 내면에 대한 검열이다. 부정적 생각이 깃들지 않도록 자기 마음을 끊임없이 검열하는 것.
칼뱅주의에서 모든 것이 신의 예정에 달려 있듯이, 긍정적 사고의 주창자들에게 지금 현실에 나타난 모든 결과는 자기 마음이 초래한 것들이다. 긍정적인 생각이 부와 성공을 끌어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 모든 불행은 개인의 책임으로 남게 된다. 가난도 실직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자신의 탓이다. 긍정적 사고의 전도사에는 보수 기독교/공화당주의자로부터 오프라 윈프리 같은 민주당 지지자까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고틀은(사고라 부를 수도 없지만) 이 복잡다단한 세상사의 원인을 개인의 내면이라는 한 가지 요인에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고 보수적인 세계관이며, '마음'을 실체화하여 숭배한다는 점에서 유사종교의 성격을 지닌다.
'마음'은 외부의 물리적인 현상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어떤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마음/생각은 인간이 외부 세계의 자극을 수용하고 변용하거나 거부하는 과정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서 어떤 경험의 원인이 아니라 경험의 결과로 우리 마음에 찍힌 풍경이며(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될 수는 있지만) 우리 마음/생각이 외부에 미치는 영향력의 범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외부 세계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단순히 긍정적인 생각/마음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밖의 환경과 맞부딪히며 살아가는 가운데 고민하고 사유하고 행동한 것들이 쌓여 이루어진 삶 전반에 대한 태도이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성공과 부를 끌어오겠다는 긍정적 생각/마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삶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포함한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부터 눈길을 돌리지 않으면서 그 부정적인 것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것들을 물리치면서 자신이 가꾸어내고 사랑할 수 있는 밝고 튼튼한 세계를 확장시켜갈 수 있는 역량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다가올 위협을 경계할 줄 알고 준비할 줄 알고 토론하고 사유하고 행동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감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지 우리 시선을 바깥 세계로부터 거두어 물질 세계가 내 뜻대로 된다는 주관적 환상에 가두는 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 그러한 환상은 우리 삶에 실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우리가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안목과 의지와 능력을 길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은 다 끌어당길 수 있다는 '시크릿' 류의 유아론적 태도가 개명한 21세기에 이처럼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장, 대형쇼핑몰, 기업형교회로 이어지는 삶의 동선이 이러한 '시장지향적' 인간성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언제든 해고와 실업에 처할 수 있는 현대사회의 불안정한 고용 여건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긍정적 사고'라는 마약의 주입 없이는 살아가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리라. 우리 시대가 그러한 마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증후군에 빠져 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진정한 행복의 조건은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순진한 낙관론이 아니라 "주의 깊은 현실주의"이다. 때로는 "지금은 슬픔의 시간, 가장 어두운 밤의 시간(카푸친스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밤이 지나면 또 새벽 여명이 찾아오리니, 우리 삶은 어둠을 물리치면서 밝은 곳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오랜 여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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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배워야 할 것은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비판적' 사고이다. 비판적 사고란 본질적으로 회의를 품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또 가장 성공할 학생은 잠깐 교수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날카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학생이다. 대학원생이라면 전공이 문학이든 공학이든 권위 있는 인물에 도전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 동료들의 생각과 배치되더라도 밀고나가 자신의 새로운 관점을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학계가 반대 의견을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긍정적 사고의 권위자들이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바로 그 '지나친 합리성'을 추구하고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야말로 사회에 필요한 인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pp274)
"이는 단순히 세계에 관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개인 및 인류라는 종으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발명한 근본 기술들은 모두 냉철한 경험주의에 철저하게 의존한 것이었다. 조짐이 상서롭거나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화살촉이 숨어 있는 들소를 꿰뚫고 뗏목이 물 위에 뜰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면 안 된다. 선사시대 인류는 자연 세계와 그것이 주는 물질들을 면밀히 연구해야 했다. 그런 다음엔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확실히 알 때까지 시행착오를 거치며 실험을 거듭했다. 지구상에서 수십만 년을 살아오는 동안 우리가 다양한 종류의 미신과 신비로운 비전, 집단적 기만을 따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에 흩어져 있다가 지구 곳곳으로 뻗어나가서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매듭을 단단히 묶고, 은신처와 배를 견고하게 만들고, 창끝을 날카롭게 갈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인류의 지적 진보는 우리가 사물을 자기 감정의 투사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가장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파악하려 했던 오랜 투쟁의 결과다. 천둥은 하늘의 분노가 아니고, 질병은 신이 내리는 벌이 아니며, 마법이 사고나 죽음을 초래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그것은 이 세계가 인간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인과관계, 개연성, 우연이라는 자체의 알고리즘에 의해 전개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는 과정이었다."(pp271-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