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철학, 심리

<사랑에 관한 연구>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릴라~ 2013. 10. 23. 06:26

 

사랑에 관한 노래나 드라마는 많지만 그것을 인문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일 것이다. 프롬은 이 책에서 사랑이 대상만 주어지면 누구나 쉽게 빠져들 수 있는 감정이 아님을 강조하고 사랑을 의지와 능력의 문제로 접근하면서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고 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 책은 사랑을 드물고 귀한 현상이라고 간주하는 점에서는 프롬과 같은 지점에 있지만, 다른 여타의 인간 활동과 구분되는 사랑이라는 현상 그 자체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집중적으로 파고든다는 점에서 프롬이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잘 조명해준다. 그는 '사랑'을 우리가 흔히 쓰는 일반적인 용법의 '사랑들'과 구분함은 물론, 사랑을 사랑으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결과들, 열정, 애정, 소속감 등과도 구분하고 있다.

 

그는 사랑이라는 현상의 고유한 본질을 '빠짐'의 경험으로 규정한다. 그 '빠짐'은 단지 개인의 주관적 환상이나 욕망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인을 향한 낯선 여정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을 자기화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매혹되고 전염되면서 우리와 다른 타자의 내면으로 건너가고자 한다는 점이 사랑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이 이 세상과 맞먹는 크기와 무게를 지니고 우리 앞에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 우리로 하여금 다른 존재를 열망하도록 하고 그 존재와 일치하고자 하는 바람을 만들어내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좁은 영토에서 벗어나 존재의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게 하는 높은 수준의 생명력이 저자가 말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일정 부분 성적 본능의 작용을 받지만 살아있는 인간에 대한 '급진적인 호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자에게 사랑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빠짐'이 없는 사랑은 없지만 저자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빠짐'을 경험하려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호기심과 민감성이 필요하다. 표정과 몸짓으로부터 진정성을 읽어내는 섬세한 직관, 미적 감수성, 사람의 깊이와 됨됨이를 읽는 안목 등 프롬이 말한 것과 같은 사랑의 능력들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처럼 타인에게 '빠져듦'이 단지 주관적 투사가 아니라 그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진정한 '빠져듦'일 때 사랑은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얻을 수 없는 삶에 대한 심오한 인식을 허락한다. 타인의 내면을 읽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자기 존재의 심원한 변화를 경험하는 특별한 여행이 되는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거 내 사랑의 경험을 돌아볼 때 상대방이 내게 총체적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느낌이 언제나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몸은 만져지지만 마음은 만져지지 않는 느낌. 지금 생각하면 그 어긋남의 원인은 나와 잘 맞지 않는 상대를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게 상대방의 내면과 그 관계의 정신성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있고 다양한 종류의 관계가 있다. 서로에게 감염된다는 것이 타인의 내면을 향해 도약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래서 사랑은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의 '깊이'를 이해하는 독특한 체험이라는 것을 당시엔 잘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사랑은 단순한 '빠짐'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빠지는가'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이 한 인격에, 그 인격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영감에 매혹되는 것일 때 그 사랑의 감정은 옅어질지언정 결코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온전한 사랑이란 일단 태어나면 소멸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 처음엔 의문을 품었으나 책을 다 읽고는 가만히 동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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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사랑과 욕망을 구분할 수 있는 더 멋진 논리가 있다.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은 그것을 소유하려는 것이다. 소유란 우리의 궤도를 돌던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의 일부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욕망은 그 대상을 얻는 순간 없어진다. 반대로 사랑은 불완전하고 영원한 어떤 것이다. 욕망은 수동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원하게 된다. 이때 나는 중력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 대상들이 내게로 빨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사랑에 있어 모든 것은 움직임 자체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그 대상에게 가서 그 안에 존재하려 한다. 어쩌면 이것이 대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유일한 시련일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진정한 사랑은 '빠짐'이 있는 사랑이다. 그것은 두 가지 성분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하나는 총체적인 환상을 주는 그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사람에 의해서 내가 그 사람의 깊은 곳까지 흡수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나의 고유한 삶의 근원에서 뿌리 뽑혀서 다른 존재의 근원으로 이식되는 것과 같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 역시 무엇을 하다가도 결국 돌아가게 되는 그런 존재가 된다. 모든 세상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을 대체해버리기 때문이다.

 

시를 쓸 수 있는 재능, 순교의 정신, 음악을 만드는 특별한 영감, 명령할 수 있는 힘, 무한한 용기, 이 모든 것들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도 극히 적고 사랑받는 사람도 극히 적다. 사랑은 자신만의 규율과 다른 것들과 섞이지 않는 순수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마술에 걸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타인을 '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즉, 인간성에 대한 살아있는 호기심이 필요하다. 이러한 호기심 없이는 우리 앞을 지나가는 바로 그 생명체를 감지하지 못한다.

 

주목할 것은 이런 호기심은 다른 많은 것을 함축한다는 점이다. 높은 수준의 생명력을 가진 유기체만이 이 빛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둘러싼 신비한 존재들을 그저 무심히 바라볼 뿐이며 예정된 삶의 스케치를 벗어나는 특별한 현상을 보면 숨어 버린다. 니체를 추종했던 지멜은 이렇게 말했다. "삶의 본질은 더 많은 삶을 열망하는 것"이라고. 산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맥박을 증가시키려는 열망이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인생은 병든 것이고 본연의 의미에서 그것은 인생이 아니라는 뜻일 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관적인 관심 영역에 파묻혀 산다. 많은 경우에 그들의 관심은 멋지고 존중할 만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가장 심오한 곳을 향해 떠날 수 있는 '이주의 열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를 둘러싼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해서 때로는 만족하고, 때로는 저주하면서 삶의 더 높은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망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것은 급진적인 호기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자기 자신을 떠나서 다른 어떤 곳으로 이동하려는 불가해한 열망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습적이고, 알고 있는 것에 쉽게 만족해 버리는 프티부르주아는 진정한 방식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어렵다. 

 

이런 강력한 호기심이 때로는 삶에 고뇌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제공하기도 한다. 사물에 대한 호기심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섬세하고 복잡한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통찰력, 그것은 특별한 직관으로서 타인의 내면을 정확하고 빠르게 읽어내도록 한다. 이런 능력을 통해 우리는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고 그의 됨됨이를 평가하며 깊이와 가벼움을 잴 수 있다.

 

결국, 사랑은 사랑에 빠진 이에게 너무나 특별한 한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얼굴과 목소리와 표정과 태도에서 자신의 진정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온전한 사랑이란 일단 태어나면 소멸되지 않는다. 거짓말 같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내 생각에 온전한 사랑이라면, 환경과 거리상의 장애가 충분한 애정을 공급하는 걸 방해하여 애정의 굵은 선이 가는 선으로 바뀔지는 모르지만, 말라비틀어진 상태에서도 감정의 동맥은 사랑을 끊임없이 담아 심장으로 옮기는 법이다.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의 운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 적어도 감정의 본질만은 손상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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