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일 | 김기덕 감독 ― 우리 시대의 정의로움에 대한 집요한 탐구
김기덕의 '일대일'.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 영화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부제를 붙였다. 우리가 살면서 관념적인 차원이 아니라 생의 한복판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여고생 오민주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 그들은 그 질문에 대면했고, 윗사람이 시켜서 라고 변명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질문을 회피한다. 아니, 그 질문에 대한 그들의 답은 '시키는 대로 행하는 자'일 것이다.
그들에게 복수하는 그림자들 또한 같은 질문을 피해가지 못한다. 그들은 오민주의 죽음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 응징하자는 마동석의 계획에 동참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회의에 빠져든다. 복수의 행위가 그들의 내적 결단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민주의 살해를 지시한 보스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그림자들에게 붙잡혀와서야 자신이 사회에서 맡은 역할이 미꾸라지들이 죽지 않게 긴장시키는 가물치임을 알게 되었노라 이야기한다. 그는 그만치 뻔뻔스럽고 죄책감이 없으며, 인간다움의 근거라 할 수 있는 그 자신의 고유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보스의 죽음으로 세상에 평화가 깃들지는 않는다. 부당한 지시를 무비판적으로 순종하는 이들이 여전히 세상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공수부대원 차림의 남자가 마동석을 죽이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오민주의 죽음에 문제를 제기했던 마동석은 오민주와 마찬가지로 살해당한다.
마동석은 누구인가. 그는 오민주의 죽음 앞에 행동에 나서지만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진정한 역할은 모든 사람에게 질문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가닿는다. 윗선의 명령을 시키는 대로 따랐던 정부 요원들에게 그 질문은 끔찍한 두려움으로 다가왔고(김기덕 영화의 폭력은 늘 은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림자들에게 그 질문은 끝까지 복수를 할 필요가 있냐는 회의와 함께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강자(정부 요원)는 폭력 앞에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고, 약자(그림자) 또한 작은 욕망 앞에 쉽게 무릎을 꿇었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왜 감독이 이 영화를 노무현을 위해 만들었다고 했는지 어슴프레 짐작이 갔다. 영화 '일대일'은 그 사건을 중심으로 김기덕이 지금 이 시대를 바라보고 해석한 내용이라 보아도 좋겠다. 노무현의 죽음이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인 이유는 그것이 단지 한 개인의 인격적 죽음이 아니라 한국인 저마다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던 한 심리적 원형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마동석이 만났던 모든 인간 군상들은 그 죽음을 대하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그를 죽였고 그의 죽음을 용인했고 그의 죽음이 제기하는 질문 앞에서 눈을 돌렸다.
영화는 현재진행형인 비극을 보여주고 있다. 감독이 묻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들 각자는 이 고통의 연쇄 고리 속에서 어디쯤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이는 우리 시대의 '정의로움'에 대한 집요한 물음이기도 하다. <일대일>은 말하고 있다. 빈자와 부자가, 권력자와 서민이,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얽히고 섥힌 이 사회의 그물망에서 누구도 이 질문을 외면하거나 피해갈 수 없다고. 이 물음은 단지 이념의 문제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라는 가장 근원적이고 강력한 물음이라고. 이 물음을 죽이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