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역사, 인물

<이병주와 지리산> - 김윤식

릴라~ 2015. 6. 13. 14:56

 

 

 

제목이 '이병주와 지리산'이다. 하지만 책 전체는 지리산론이 아니라 이병주론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 지리산에 대한 내용이 기대보다 적어서 아쉬웠다.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2차대전에 일본군에 징용된 학병은 사천여명이라고 한다. 이병주 또한 학병 출신이다. 학병 세대의 기록은 하준수가 남긴 짧은 수기 이외에는 소설 '지리산'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김윤식은 이 소설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한다. 이렇게 볼 때 '지리산'은 빨치산 소설이 아닌 '학병 소설', "학병 세대의 내면 풍경"(359)에 대한 기록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학병 세대에 대한 김윤식의 관심은 다음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학병 세대가 해방공간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할 것인가?"(353) 그들은 빨치산 두목이 될 것인가, 경찰 두목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장사꾼이나 모리배가 될 것인가?(353)  당시 최고의 엘리트면서 식민지 종주국의 노예로서 참전한 경험이 그들의 이후 삶을 어떤 방식으로 규정하고 이끌었을까?

 

 

 

소설 전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규와 박태영, 그리고 이들의 스승 하영근이다. 당대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들이다. 하지만 김윤식은 이들이 인식하는 '근대'가 '수준 낮은 계몽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이들이 근대를 헤쳐나가는 방식이 일제 교양주의 교육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영근은 '관념에의 편향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조국의 장래를 염려하고 재원이라 할 수 있는 이규와 박태영을 아낌없이 후원하지만 동시에 소작인에게 가혹하며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하며 생존을 도모한다. 이규와 박태영 또한 큰 틀에서 하영근의 시대 인식의 테두리 안에 있다. 온순한 모범생 이규는 하영근의 조언에 의해 한국을 떠나 서방세계로의 유학을 택하고, 체제에 반항적인 박태영은 빨치산을 택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에 회의를 품은 채로 산에서 죽음을 맞는다. 김윤식이 보기에 이들 모두는 일본식교육이 낳은 허무주의자들이다.

 

 

 

하영근의 관념성을 대변하는 또다른 인물이 공산주의자 권창혁이다. 사상으로서의 공산주의와 당과 조직으로서의 공산주의는 다르다. 권창혁은 부하린 재판 과정 등을 들어서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끼지만, 그것은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공산주의 조직과 제도의 문제이다. 권창혁은 이데올로기의 사상적 측면과 제도적 측면을 매개하지 못하기에 허무주의에 빠진다.

 

 

 

공산주의의 제도적 측면을 보여주는 이는 이현상이다. 소설에서 이현상은 행동주의자로 그려져 있다. 이병주는 이현상을 통해 공산주의의 제도적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하지만 김윤식은 이러한 비판이 자본주의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자본주의 제도 역시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비인간적 측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윤식은 지리산의 참 주제가 사상으로서의 공산주의와 제도로서의 공산주의의 대결을 보여주는 지점에 놓여 있지만 작가의 한계로 인해 이 점이 충분히 다루어지지 못했다고 본다. 이병주가 공산주의의 제도적 측면을 잘 모르기에 이현상에 대한 제대로된 비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병주는 그 시대를 휩쓴 이념적 대결을 '허망한 정열'로 이해한다. 공산주의뿐 아니라 모든 사상에의 정열이 다 허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리산의 대답은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소설 '지리산'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김윤식은 당대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겪는 가치 체계의 내부 혼란을 지리산이 보여주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학병 세대인 이병주가 주장하는 바는 흑백이 아닌 '회색의 사상'이다.  그는 "흑백 논리가 가져오는 죽음의 질곡과 맞서고자" 했고 그러한 고민은 조국도 사상도 아닌 '산천'에 대한 애정으로 귀결된다. 그는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지리산의 흙과 물'의 품에 안긴다. "나에게는 조국이 없다. 오직 산하가 있을 뿐이다."

 

 

 

"오직 산하가 있을 뿐..."  아름답지만 다분히 허무주의적인 귀결이다.  감성적으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성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결말이었다. 흑백 논리가 아닌, '회색이 되라'는 작가의 외침이 산천을 향한 절대적 울림으로 대치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회색'의 진정한 의미는 '산하'가 아니라 인간의 길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윤식이 '지리산'의 진짜 주인공을 이규, 박태영, 하영근이 아닌, '하준규'로 본 점은 의미심장했다. 하준규는 일제 강제 징용을 거부하고 지리산에 숨어들어 '보광당'이라는 훌륭한 자치 조직을 만든 1세대 빨치산으로서 해방 이후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다가 이현상을 통해서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는 공산당의 운동 방식에 회의하지만 함께 입당한 동지들을 버릴 수 없어 조직을 탈퇴하지 못하고 인민군 소장으로 6.25에 참전했다가 사살된다. 

 

 

 

인간적 품성, 실천 의지, 행동 능력 모두를 겸비한 하준규의 실패야말로 그 시대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제대로 된 민족주의자들이 설 땅이 그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상에의 정열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길을 밝혀줄 자생적인 사상을 갖지 못한 시대. '회색'이 힘을 얻기가 어려웠던 시대. 우리가 필요로 하는 '회색'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지속해야 할 고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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