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가 빠진 교육 _ 어떻게 읽을 것인가
생각해보니 '별 헤는 밤' 수업은 처음이다.
이 시를 다같이 암송한 적은 몇 번 있지만 '별 헤는 밤'이 교과서 주 단원으로 나온 적은 없었다.
지금 교과서에서도 보충 자료에만 등장하는데, 꼭 함께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라
3월 첫 작품으로 선정했다.
글은 단순히 의미 파악의 대상이 아니다.
글은 한 사람의 숨결과 땀이 배어 있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글의 배후에는 언제나 뜨거운 심장을 지닌 한 사람이 있고,
그가 겪은 시간과 그가 헤쳐간 시대가 가로놓여 있다.
글을 읽는 것은 그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그가 세상을 헤쳐가는 방식을 따라가보는 것이다.
물론 문학 작품의 경우 작가의 삶이 작품 내용와 직결되지는 않으며
작품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화학적 반응을 독자 안에서 탄생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이 작가의 경험과 사상과 철학의 집적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작가의 의도를 찾아가는 과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앎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현행 국어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글에서 작가를 지나치게 거세하는 것이다.
글을 생명을 지닌 일종의 예술품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이러 저리 함부로 자르고 짜깁기해서 교과서에 편성해놓는다.
그래서 글을 통해 작가의 경험과 가치관을 복원하기보다는
형식주의적 해석에 기울어서 글을 교육과정의 잘게 세분화된 목표들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어쩌면 이것도 식민지교육의 잔향일지도 모른다.
도옥 김용옥은 식민지교육을 다른 건 다 가르치되 독립정신만 가르치지 않는 거라고 말한 바 있다.
국어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걸 다 가르치는데 '주어'가 빠진 교육이라고 할까.
객관적 내용 위주의 글이 많고 작가의 사상과 관점을 또렷이 다루지 않는 것. 결국 주체성이 없는 것.
글 쓴 사람을 조명하자는 것이 전공 영역에서 다루는 작가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초중등교육은 교양교육이자 민주시민교육이며
글을 통해서 한 사람이 자기 시대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만나는 것이 핵심이라는 이야기다.
죽어있는 문자를 생생한 경험으로 복원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교과서의 여러 글 중에서 다룰 만한 가치 있는 작품으로 윤동주, 한용운, 김구를 선택했고
작품 감상 전에 이분들의 삶의 행로를 소개하는데 공을 들이기로 했다.
감상은 오로지 학생 몫이다. 그것을 주입해서 넣어줄 수는 없다.
대신에 좀 더 깊은 감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초 작업을 튼튼히 하는 것이 수업에서 할 일이라 생각했다.
예전엔 작품에서 내가 느낀 의미를 학생들이 어떻게 느끼게 할까, 작품 감상 방법에 신경을 썼다면
지금은 감상을 할 수 있는 토대를 쌓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느끼고 있다.
윤동주의 삶과 그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과 스토리를 주춧돌로 놓아주고(비고츠키의 비계 같은 것)
감상의 집은 학생이 스스로 짓는 것이다.
각자 교사가 안내한 배경 이야기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의 의미는 저마다 자기 위치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
교사가 할 수 있는 것과 학생이 할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분리하는 것,
그래서 애써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가르칠 수 없으므로)
배움이 일어날 수 있는 기초 환경을 만드는 작업에
공이 들어가는 그런 수업을 기획하고 있다.
교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기 시작하자
수업 준비 과정에서 내가 예상치 못했던 여유와 활기가 생겼다.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무엇을 놓아야 할지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