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철학, 심리

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 알랭 바디우,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릴라~ 2017. 8. 7. 22:10

라캉을 좀 읽고 싶은데, 바로 읽었다가는 헤맬 것 같아서 감을 좀 잡기 위해 선택한 책. 배경지식이 없어 논의를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담집이라서 쉽게 읽힌다. 대담자는 두 명인데 알랭 바디우야 워낙 유명한 철학자라 말할 필요 없고, 루디네스코는 라캉의 제자로 라캉의 전기문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이들은 라캉의 강의를 직접 듣고 배운 세대로서 68혁명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라캉을 만나고 사유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라캉이 정신분석과 철학을 동시에 전복시켰다고 보고 있다. 정신분석이 의학과 심리학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라캉은 정신분석을 철학적 담론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우연한 세계에 던져진 인간이 운명적인 결단에 의해 주체성을 획득한다는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과, 주체를 무너뜨리고 주체를 구조의 한 항으로 격하시킨 구조주의의 갈등이 팽배하던 상황에서, 라캉은 이론적으로 독특한 입장을 견지한다. 그는 주체가 무의식(언어)의 지배를 받고 많은 타자성에 노출되어 있긴 하지만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담지하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의 자격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라캉에게는 타자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많은 동시대인들은 이러한 라캉의 사유로부터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는 라캉의 시대이다.

 

번역은 좀 아쉽다. 비문이 꽤 많이 보인다.

 

 

21세기는 이제부터 라캉의 세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서 보이는 일탈들은 이미 라캉이 예견한 것들이고, 우리는 라캉의 사유를 통해 그것들과 싸울 수 있기 때문이죠. 그 자신 쾌락을 좇는 사람이긴 했어도, 라캉은 욕망의 진리에 대한 추구를 환상으로 대체하는 맹목적 쾌락주의를 권하지는 않았죠. 라캉은, 타자성이 우리를 구성하는 것임을 부인하면서 자기정체성을 추구하는 정신적 퇴행의 모든 형태에 맞섰고, 인간을 자연성으로, 생물학적 존재로, 신체와 뇌로 환원하는 행동주의와 인지주의에도 반대했어요. 동물을 무척 사랑하면서도 늘 라캉은, 오늘날의 열렬한 환경주의와 동물행동학 추종자들처럼 인간과 동물 사이에 절대적 연속성이 있다는 생각을 우스꽝스럽다고 판단했죠. 자신의 주체와 시니피앙 이론을 통해서 라캉은, 물론 다윈주의자로 계속해서 남긴 했지만,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있는 필연적 간극을 유지했어요. pp54-55

 

한편으로 그는, 임상 경험에 의해 식견이 생기고 과학적 확실성의 모델에 의해 인도되어, 주체적 경험을 결정하는 체계로서 무의식 개념을 혁신했죠.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부 다 갈아엎는 한이 있더라도, 현상학의 핵심을 이루던 주체 개념(특히 주체를 의식과 자유의 이론에 결부시키는 사르트르의 개념)을 견지하려 했습니다. 라캉은 힘든 길을 걸었죠. 구조주의와 현상학이 가파른 사면을 이루는 능선 위를 말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하나의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이 주체의 구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구조주의의 유산을 끌어모아 재주조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저마다 윤리적 성격의 자유로운 위험을 떠안을 가능성을 단언함으로써 주체의 개념을 그 모든 급진성에서 재구성하죠. 라캉의 주요한 세미나들 중 하나가 '정신분석의 윤리'라고 명명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윤리적 차원은 주체 자신의 자신의 욕망의 구조를 단언하고 그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라캉의 유명한 표현을 빌려 고쳐 말한다면, 명령은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는 것인데, 라캉은 이 표현이 대체로 '자신의 의무를 행하라'는 의미라고 말하곤 했죠.

 

이처럼 저는 라캉이 대가인 것은 두 요구가 수렴하는 지점에 그가 위치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먼저 라캉은 계몽적 인간으로서 합리성의 요구와 과학성의 이상을 떠안고 있죠. 그에게 과학성의 이상은 구조의 절대성 및 한번도 저버린 적 없는 주체적 경험의 형식화에 대한 추구와 합쳐집니다. 두번째로 그는 자신의 고유한 운명을 형성하는 주체의 비환원성을 받아들입니다. 이는 반역적이면서도 극적인 시각인데, 연극, 특히 그리스 비극에서 크게 영향받은 것이죠. 라캉은 그리스 비극을 끊임없이 참조했어요. 연극의 위력을 알아차렸던 계몽적 인간, 그것이 바로 제가 제시하고자 하는 라캉의 초상화입니다. pp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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