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공부/ 엄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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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경탄하고 압도당할 수 있지만, 공부 없이는 그것을 향유하지 못한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파악하고 이름을 붙이는 지적 과정의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 반대로, 이런 지적 쾌감을 느끼지 못할 때 공부는 그저 괴로운 것이 될 뿐이다. 이게 바로 공부하게 만들려다 자주 일어나는 '공부를 죽이는' 방식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면, 경험의 구조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배우는 이가 자신을 압도해 경탄을 일으키는 대상을 만날 때, 그 경험을 공부에 관한 경험으로 바꿔치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러면 배우는 이는 분별하는 힘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가도 공부 자체에 압도된다. 공부는 '지겹고 고통스럽기만 한 것'으로 겪어버리기 때문에 다시는 공부에 흥미를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1부에서 말했듯이, 듀이는 인간의 경험을 '해보는 것'과 '겪는 것'으로 구분했다. 무엇을 할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겪는다. 불에 손을 넣으면 화상을 ㅇ립는 것처럼, '겪는 것'이 반드시 있따. 그러나 겪는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인지되는 것은 아니다. 겪는 것들 중에서 대다수는 그저 지나간다. 이렇게 지나가는 겪음으로는 배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겪음을 통해 사람이 배운다고 할 때 그 겪음은 내가 예기치 못한 것, 알지 못하는 것과 만나는 순간이다. 이 장 앞부분에서 말했듯이, 나를 압도할 정도로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피렌체의 다비드 상이나 밤하늘의 별과 만난 것이 나를 압도하며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겪음, 경험이다. 이런 경험이 사람을 배움으로 이끈다.
그러나 겪는다고 바로 배움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중간에 또 다른 과정이 있다. 그것을 하나씩 들여다보자. 첫째, 내가 예기치 못한 것을 겪었을 때 사람에게 반드시 떠오르는 것이 질문이다. "어, 이게 뭐지?" "이게 왜 이렇지?" "어떻게 이렇게 돼지?" 예상하지 못한 것을 만나게 되는 순간 깨닫는 것은, 지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르기 때문에, 그 반응은 일단 '질문'의 형태로 떠오른다. 다른 말로 하면, 질문이 발생하지 않는 겪음은 겪음이라고 할 수 없다. 겪자마자 그게 무엇인지 알면, 해결하면 그만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속담처럼, 사람은 아는 것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질문이 없다는 말이다. 질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해답으로 직행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질문을 통해서 배운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질문은 내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말이나 해답으로는 설명되지도 않고 문제가 풀리지도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말의 형식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경탄도 처음에는 "억!" 소리가 나며 말문이 막히지만 곧 자기가 경험한 경이가 무엇인지에 관해 질문을 하게 된다. 답이 없는 곳에서 질문을 하는 것이라 질문과 함께 답을 찾는 과정이 시작된다. 이 과정이 바로 공부다.
경이로움으로 배움의 길에 들어선 많은 사람이 배움을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질문을 하고 답을 찾기 위해 생각하는 것은 이 과정 자체에 매혹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리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질문하고 답을 찾기 위해 씨름하는 이 '지적인 과정'이 주는 쾌감, 즉 분별의 힘이 커지는 걸 경험한 사람만이 이 과정을 견딜 수 있다.
이 점은 분명히 해두자. 공부를 재미있게 하기 위한 노력은 해야겠지만, 공부의 과정 전체가 재미있을 수 없다. 그 재미없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것은 공부의 어떤 순간, 공부가 가져다주는 '유레카!'의 순간이다. 공부하는 매 순간이 '유레카'라는 건 거짓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지적 쾌감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싫증을 느끼고 흥미를 읽기 쉽다. 그 정도로까지 알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공부를 그만두게 된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현장에서는 좀 더 나쁜 일이 발생한다. 배우는 이가 경탄을 느낀 다음에 그것을 너무 재빨리 공부의 과정으로 전환시켜버린다는 점이다. 경이로움을 느꼈다 하더라도 그 경이를 배움으로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발생하지 않는다. 생기지도 않은 배움이 강요되고 있으며, 이것이 공부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경험하게 한다.
또한, 경이를 경험했을 때 그 경험이 바로 배움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경이로움에 충분히 젖고 난 다음에, 그 경이로움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 때 호기심을 갖는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지나치게 빨리 무엇을 배웠는지 묻고 답하게 한다. 경이에서 배움으로 가기 위해 필수적인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경험을 통해 무엇인가를 느끼고 질문이 떠오르면, 그것에 관해 생각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간을 주지 않은 채 바로 답하게 하니 공부가 고통스러운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1부에서 말한 '글쓰기' 교육이다. 체험학습을 하고 난 다음에 바로 글을 쓰라고 하면 경험한 것을 쓰는 게 아니라 뻔한 내용을 쓰게 된다. 경험한 것에 관해 느끼고 생각하고 질문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또는, 경험에서 느낀 게 없는 학생들도 '분량'에 맞춰 글을 써야 한다. 경험에 대한 글쓰기에서 글쓰기에 대한 경험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이러니 글쓰기는 그저 재미없고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가뜩이나 질문하고 생각하는 것도 재미없는데, 공부 과정이 아예 공부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구조화해 놓은 것이다.
나는 이것이 '경험을 통한 공부, 경험에 관한 공부'를 '공부에 관한 경험'으로 바꿔치기하는 나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듀이가 말한 개념을 사용한다면, 공부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겪는 것이다. 공부는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지적 쾌감도 주는 것임을 알 수 없다. 후자는 빠지고 그저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경험해버리면 다시는 공부를 하고 싶어지지 않는다. pp260-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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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을 방해하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경탄이 공부의 출발점이라고 할 때, 경탄은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감수성이 좋은 이는, 다른 사람은 그저 그런 일로 넘어가는 것도 새롭고 경탄할 만한 일로 경험한다. 관심과 취향의 차이도 있겠지만, 지금 배움이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감수성의 문제다. 자극에 지나치게 많이 노출되는 바람에 역치가 높아져서, 어지간한 자극으로는 경탄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모든 게 시시해져버려 경탄할 만한 것을 만나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경우에도 배움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어지간한 일에는 경탄하지 않게 된 데는 스펙터클의 문제가 있다. 기 드보르라는 프랑스의 철학자는 우리가 스펙터클, 즉 구경거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스펙터클은 시시하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압도한다. 더 큰 크기로, 더 빠른 속도로, 더 짜릿한 것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이런 식으로 스펙터클에 압도당하고 나면 다른 모든 것은 시시해지지 앟을 수 없다.
스펙터클 사회의 더 큰 문제는 모든 것을 스펙터클, 즉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아무리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해도, 구경거리가 되면 더 이상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 스펙터클은 구경, 즉 소비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배움도 마찬가지로 소비가 되고 있다. 지금은 대가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것이 귀하고 드문 일이 아니다. 인터넷에 들어가거나 텔레비전을 틀면 언제든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것도 공부를 구경거리로 만든 사례지만, 이미 강의 자체가 구경거리로 최적화되어 제공된다. 강의라는 구경거리를 관람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스펙터클 사회에서는 배움의 과정이 구경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나는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종종 한다. "당신들은 여기에 공부를 하러 온 것입니까?" 많은 사람이 이 질문에 당황한다. 자기가 하는 게 공부인지 공부 구경인지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그게 공부가 아니라 공부 구경인 것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공부 구경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없다. pp265-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