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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꿈꾸는 교육 교육이 숨쉬는 학교 | 권재원 ㅡ 학교는 공적 기관이지 가정을 대신하는 양육 기관이 아니다

릴라~ 2018. 5. 2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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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인적자원부는 참여정부에서도 그 이름을 유지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성향상 여기에 권위주의 탈피, 교육민주화가 굵은 방점과 함께 추가되었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그 출발부터 문제가 생겼다. NEIS 문제 때문에 출범하자마자 전교조와 갈등이 폭발했다.

 

이 갈등은 진보성향의 신임 교육부총리와 전교조를 이간질시키려는 세력들에게는 대다한 호재였다. 결국 진보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윤덕홍 교육부총리는 뭐 하나 해 보지도 못하고 교육관료들에게 휘둘리기만 하다가 물러났다. 이때를 기회 삼아 대전에서 전국의 교장들이 모여 노무현 대통령을 '노무현 씨'라고 부르면서 불법집회를 열었다. 학교 권위주의의 또 다른 한 축인 사립학교 재단의 민주화를 위해 시도한 사립학교법 개정도 강력한 저항에 가로막혀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 

 

이렇게 교육계 권위주의의 두 축인 사학재단과 교장 등의 관료집단의 지배를 무너뜨리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학교의 탈권위주의는 오히려 통제와 억압에 시달리던 교사에게 남아 있던 그나마의 권위만 해체하고 말았다. 이제 교사들은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관료와 사학재단의 권위주의적 지배가 온전히 남아 있는 가운데, 학생들에 대한 권위만 사라진 샌드위치 동네북이 된 것이다. 이게 바로 '교실붕괴'라고 불리던 현상의 근원이다.

 

더 나쁜 것은 참여정부가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무시하고,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정부와 시민, 공공과 민간의 관계처럼 보았다는 것이다. 참여정부가 생각한 교육민주화란 교육이 부당한 간섭과 관료적 통제로부터 자주성과 전문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학생 학부모를 고객으로 모시고 그들의 통제를 받는 것이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권력관계로 본 것이다. 이런 그릇된 관점은 최근 이재정, 조희연 교육감에게서도 보인다. 

 

희한한 것은 이 권력관계는 오직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서만 문젯거리가 되었고, 교장과 교사, 관료와 학교 사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학부모가 학교 주인 노릇 하라고 학교운영위원회에서도 학부모위원이 과반이 되도록 정했으나, 정작 학부모들이 교장 편이 되어 의식 있는 교사들을 다수결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교육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교육부가 대통령의 눈을 가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로써 학생과 학부모가 주인이고 교사는 다만 그들의 피고용인이라는 식의 논리가 '수요자중심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확산되었다. 교사를 공급자, 즉 판매자 혹은 업주로 학부모를 수요자, 즉 고객의 위치에 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라 학교는 수요자인 학부모가 원하는 교육 상품을 판매하는 일종의 서비스업이 되었다. '교원능력계발평가'가 도입된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고객이 만족할 수 있도록 직원들의 경쟁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지금은 능력계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원래 이 제도의 출발점은 '저성과자, 부적격 교원 퇴출'이었다. 성과급과 교원평가를 통해 교사들 간의 경쟁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고객인 학부모의 만족도를 높이겠다는 발상이다. 이런 흐름을 보면 경제관료인 김진표가 교육부총리로 임명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전문성이 요구되는 영역에 민주주의의 일반적인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의사는 환자에게 돈을 받지만 환자가 원하는 치료를 해 주지 않는다. 환자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의사는 수요자를 잘 배려하는 의사가 아니라 의사가 되면 안 될 사람이다. 의사는 환자가 원하는 치료가 아니라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를 하며, 그 판단을 환자 본인보다 더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런 사람을 전문직이라고 한다. 

 

교사를 전문직이라고 부르고, 거기에 합당한 책무성을 물으려면 바로 이 점을 인정해야 했다. 교사도 당연히 책무성을 가져야 하고, 자신의 저문성에 대한 끊임없는 피드백을 받아야 하지만, 그 방식은 '고객만족도조사' 같은 방식이 아니라 보다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방식이라야 한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교육인적자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사를 일반 노동자로 간주하였다. 그래야 관료들 자신이 학부모라는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여 이를 상품으로 개발하는 경영진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고, 교사에게 과업을 할당하는 위치에 서서 권력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수요자중심 교육이라는 관점은 학교의 민주화가 아니라 학부모의 갑질과 입시교육, 경쟁교육의 강화, 그리고 교육주체로서의 학부모 역할의 혼란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학부모는 교사와 함께 학생에게 책임지는 공동의 교육자가 아니라 세금이라는 형태로 값을 치름 고객 입장이 되었다. "고객은 왕이다"라는 말이 통하는 나라에서 이런 관점이 학교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을지는 상상력도 필요하지 않다. 학부모는 학교와 책임을 함께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을 묻는 사람, 나아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는 사람이 되었다.

 

참여정부는 이를 두고 공공기관에 대한 시민통제의 강화니, 거버넌스니 할지 모르겟지만 사실은 교육의 공공성을 가족이기주의에 종속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 가족이기주의는 끊임없이 학교에 '학원처럼'을 요구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이 니즈를 반영하여 방과후학교를 도입함으로써 실제로 학교를 학원으로 바꾸어 나갔다. 

 

이른바 거버넌스를 통한 교육의 관료주의 혁파, 탈권위주의도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교육관료들이 명령의 출발점이었던 적은 없었다. 교육의 관료주의는 언제나 명령의 전달자였다. 그 명령의 출발점이 대통령이건 학부모의 여론이건 따질 필요 없으며, 그렇게 된다고 해서 그들의 권력에는 하등의 타격도 가해지지 않는다. 그들의 권력은 학부모에게서가 아니라 교사에게 휘둘렀던 것이기 때문이다. pp159-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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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교육인적자원부는 교육과학기술부로 바뀌었다. 이렇게 이름을 바꾸고 나니 경제논리, 산업논리가 더욱 노골적으로 강조되었다. 교육이 개발하는 인적자원을 과학기술인력이라고 못박은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70년대식 교육 입국론이 다시 등장했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주입식 입시교육 강화, 경쟁교육강화로 압축되었다.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치열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대통령이 흐뭇해하자, 교과부는 이런 교육을 각급 학교에 강요하였다. 전국단위학업성취도평가를 실시하여 학교를 성적순으로 줄 세우고, 각 시도 교육청도 성적순으로 줄 세웠다. (...)

 

박근혜 정부에서 드디어 교육부라는 이름이 돌아왔다. 과학기술 분야를 미래창조과학부에 내주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교육부총리는 교육뿐 아니라 사회, 문화 부야까지 망라하는 부총리가 되면서 국무총리 바로 다음 자리가 되었다.


이렇게 이름도 되찾고 위상도 높아졌지만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는 역대 교육부 중 가장 거론할 게 없는 교육부가 되었다. 철저히 대통령의 뜻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정농단 속 대통령의 일관성 없고 모순되는 정책을 교육부가 그대로 학교 현장에 관철시키려고 함으로써 함께 제정신이 아닌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유학기제로 대표되는 이른바 '꿈끼 교육'과 국정교과서로 대표되는 획일적 교육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정책이다. 하지만 교육부는 태연하게 한번은 교육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떠들고, 다른 한편은 교과서를 하나로 통일하여 올바른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고 떠들었다. pp16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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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학교에는 교사들을 한 곳에 몰아넣은 집단 사무실인 교무실이 있다. 지금 40, 50대의 기억 속 교무실이란 되도록이면 안 가는 게 좋은 그런 공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경우가 생기면 최대한 조심스럽게 들어가서 빨리 볼 일을 보고 나오는 게 상책이었다. 공연히 그 안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붙잡히면 이런저런 지적이나 당하고 야단이나 맞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교무실에 드나드는 학생들은 정해져 있었다. 학교에서 일종의 귀족층을 형성하는 모범생이거나 사고뭉치 문제학생이거나. 


하지만 요즘 아이들, 특히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에게 교무실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교무실에 부담감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학생은 거의 없다. 교무실 출입이 모범생, 우등생, 혹은 문제학생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학생들은 거리낌 없이 교무실에 드나들며 자기가 좋아하는 교사 주변에서 수다를 떨거나, 일을 도와주거나, 간식거리를 탈취(?)한다. 이건 그동안 학생들이 버릇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학생과 교사의 관계가, 더 나아가 학교라는 공간이 학생들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느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단

적인 예가 교사를 부르는 호칭의 변화다. (...)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세계 어느 나라에도 교사, 선생님을 부르는 '애칭'이 있는 나라는  들어보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애칭은 여러 나라에 있다. 영미권에서는 파더, 마더라는 공식적인 호칭 대신 대드, 맘을 쓰고 중화권에서는 부친, 모친이라는 말 대신 공교롭게 영어처럼 들리는 빠바, 마마라는 애칭을 쓴다. 하지만 선생님을 부를 때는 다르다. 영미권에서는 깍듯이 미스터 혹은 미즈라고 부르고, 아주 친근해져서 선생님이 허락할 경우에는 아예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흔한 일은 아니다. 중화권에서도 학생이 교사를 부를 때는 나이와 상관없이 '라오슈'라고 부르지, 우리나라의 '샘'에 해당하는 말은 찾기 어렵다. 일본 학생들이 사용하는 '셈'은 자기들끼리 부를 때 쓰일 뿐 교사 앞에서 사용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샘'은 1990년대 후반에서야 등장했고, 그 이전에는 여기에 해당되는 애칭은 없었다. 학생들끼리 말할 때는 교사의 이름이나 별명을 불렀고, 교사 앞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샘'이라는 애칭의 보편화는 1990년대 후반 이후 우리나라 학교가 학생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게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서는 사회학적 리서치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1990년대 후반을 계기로 학교가 가정의 역할을 점점 더 많이 감당하게 된 것과 관련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학교는 원칙적으로는 2차집단이며 공적 기관이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학교가 점점 1차집단으로 바뀌고, 공식적 관계인 교사-학생의 관계가 친말한 관계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선생님에 대한 아빠, 엄마 격의 호칭이 필요하게 될 것이고, 때마침 등장한 '샘'이라는 말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린 것이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학교는 사회의 가치를 대변하는 공식적인 사회화 기관이지 결코 가정을 대신하는 양육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학교가 점점 친밀집단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은 가정이 점점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달갑지 않은 변화의 한 측변일 가능성이 크다. 이 변화에는 부유층 학생이나 빈곤층 학생이나 마찬가지로 노출되어 있다.

 

부유층 학생들의 경우 엄청난 사교육과 입시 압박에 노출되어 있다. 이들에게 부모는 친밀한 존재라기보다는 과중한 성취 기대로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이며, 잠잘 시간조차 부족할 만큼 각종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리는 억압적인 존재다. "엄마의 눈을 뽑아 버리고 싶다"라고 했던 어느 부유한 가정의 초등학생이 쓴 시는 패륜적인 시가 아니라 그들이 느끼는 부모와 가정에 대한 고백이었던 것이다. 그 시의 제목이 '학원 가는 날'임을 상기해 보라.

 

상대적으로 교사들도 많이 바뀌었다. 과거 억압적이고 권위적이던 교사 세대, 즉 지금 진보진영의 주요 인사들이 학교 다니던 시절의 교사들은 거의 은퇴하거나 은퇴 직전이다. 지금 학교의 주축을 이루는 교사들은 그들에게 대항했던 전교조 세대와 그보다 더 젊은 교사들이다. 이들은 학생들과 수평적인 대화에 그들 선배보다 능하다. 그러다보니 역설적으로 학교 선생님들이 어른들 중에서 학생들에게 '성적' 스트레스를 가장 덜 주고, '공부'에 대한 잔소리를 가장 덜하는 어른이 되었다.

 

물론 모든 교사가 그런 것은 아니므로 학생들은 교사를 가린다. 그래서 교사들 중에서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을 골라 정서적으로 의존하며 잃어버린 따뜻한 부모 품의 대체재를 찾는다. 조금만 관찰해보면 강남권 중학생들이 교사 앞에서 상당히 퇴행적인 말과 행동, 한마디로 어리광을 부리는 현상이 부쩍 늘어났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 부모에게는 하지 않던 속마음을 교사에게 털어놓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 

 

반면 빈곤층 학생들은 또 다른 이유에서 보살핌과 정에 굶주려 있다. 이들의 부모는 생업에 종사하느라 시간이 없다. 외벌이로는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모두 아침 일찍 일 나가서 밤 늦게 들어오거나, 낮에는 자고 저녁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하는 경우도 많다. 부모 얼굴 볼 시간이 부족하다. 게다가 볼 수 있는 시간에도 부모가 일에 너무 지쳐 있어 친밀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주취, 폭력 등으로 인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도 드물지 않고, 이들의 거주 호나경 여기 열악하고 불안정해 심리적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 이런 학생들에게 학교는 쾌적한 공간을 제공해주는 거의 유일한 곳이며,교사는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정서적 지원과 친밀감을 주는 매우 중요한 존재다. 심지어 학교에서 만나는 교사가 술에 취해 있지 않으며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유일한 어른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학교에 적대적이고 학교를 억압의 공간으로 생각하는 진보 활동가들이나 교육시민운동가들은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이런 학교의 현실을 보아야 한다. 자기들이 다녔던 학교의 기억에 의존하면 안 된다. 또 고등학교에 시선을 집중해서는 안 된다. 공교롭게도 고등학교에는 수평적 대화에 서투른 옛 세대 교사가 가장 많이 모여 있다. 지금의 학교를, 그리고 학령기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 이 아이들은 선생님이 아니라 '샘'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학교는 학업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과 친교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숨구멍이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방학을 싫어할 정도다. 방학은 학교라는 숨구멍 없이 100퍼센트 학원으로 채워지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황은 정상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학교는 공적기관이어야 하며, 교사는 학생들과 친밀한 관계보다는 공공의 가치를 대변하는 공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파울로 프레이리가 말했듯이 교사는 결코 보육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교사가 원칙만 내세워 친밀한 관계, 부모의 대체재 노릇을 포기한다면 많은 학생들은 그야말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내몰린 채 돌보는 사람조차 없는 처지가 된다. 그야말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대학입시문제는 많이 잡아봐야 30퍼센트 정도의 학생들에게만 심각한 문제다. 오히려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바로 이 '돌봄'의 요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공식적 사회화기관인 학교와 교사가 담당하면 안 되는 일이다. 돌봄과 학습은 분명히 다른 일이며 자칫 잘못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고 교사에게 의존하고 있는 이상 이 요구를 어떻게든 해결해 주어야 한다.

 

'샘', 이 한 글자 속에 참으로 무거운 과제가 담겨 있는 셈이다. pp282-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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