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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교육 관련

학교 없는 사회 - 이반 일리히

by 릴라~ 2010. 6. 16.
학교 없는 사회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이반 일리히 (생각의나무,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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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없는 사회'가 가능할까. 초중고를 거치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는 학교에서 무언가를 배웠다기보다는 배운 것을 극복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쪽에 속했다. 4년 내내 놀면서. 논다기보다는 방황에 가깝지만. 고교 3년 내내 0교시와 야자를 한 세대. 그 독을 제거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 학교에서 배운 것이 없노라고 자신있게 공언했고, 일리히와 라이머의 주장에 100% 공감했던 내가 왜 사대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진짜 배움에 대한 마음속 깊은 열망은 언제나 존재했던 것 같다. 대학에 와서는 사대의 집단주의적 분위기가 싫어서 학교는 완전 농땡이쳤지만... 암튼  학교를 바라보는 일리히의 관점은 명확하다.

"학교를 통해서는 보편적 교육을 실현할 수 없다. 보편적 교육은 현행 학교 형태 위에 세워진 어떤 대안교육으로도 실현될 수 없다. 학생에 대한 교사의 새로운 태도, 교육적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보급, 학생의 평생에 걸친 교육자의 책임 확대 시도도 보편적 교육을 실현하게 할 수 없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교육내용을 '주입'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현행 추세를, 그 정반대의 제도 추구, 즉 개개인 삶의 모든 순간을 공부하고, 나누고, 돕는 순간으로 바꾸도록 고양시키는 교육'망' 형성으로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이처럼 교육에 대해 거꾸로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기존의 다른 서비스산업에 대한 대안을 찾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개념을 제공하고자 한다."

일리히는 지금의 학교태 대신 대안학교 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주도의 '학교체제' 자체에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학교체제가 낳은 특수한 환경들, 동일 연령의 학습자 집단, 학교에서의 학생과 교사의 특수한 관계, 전일제 수업 등이 '교육'으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배움'의 가치가 근본적으로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르침이 있어야만 배울 수 있다는 환상, 교육이 하나의 상품이 되어 교육을 좋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현상, 물신주의 등... 종교의 지배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학교는 '새로운 세계종교'로 자리잡아서 학교화된 소비와 생산을 끝없이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

일리히에 따르면 대부분의 공부는 수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조작될 수도, 계획될 수도 없다. "학교가 없다면, 보편적인 장기간의 아동기도 있을 수 없고, 교실의 숨 막히는 분위기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유능한 교사라도 학교의 이와 같은 '숨은 교육과정'으로부터 학생을 완벽하게 보호해줄 수 없다. 따라서 일리히는 학교제도의 개혁이 아니라 사회를 '비학교화'하는 것의 의미를 충분히 탐색하자고 우리에게 제안한다. 비학교화된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쉽지 않은 도전이다. 배움에 관한 우리의 모든 상상력이 학교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리히가 추구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생적 제도'이다. 그는 공익사업의 가치가 왜곡되었다면서, 전화, 우편, 고속도로망이라는 네트워크의 예를 든다. 전화와 우편제도의 경우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고자 존재하지만, 고속도로는 자동차, 트럭, 버스의 소유자에게만 공익사업이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학교도 성장과 공부에 대한 자연적 성향을 수업에 대한 수요로 전환시킨, 잘못된 공익사업이다. 그것은 타인에 의해 제조된 인간성숙의 수요를 창출하고 상품에 대한 수요보다 자발적 활동의욕을 더욱 상실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일리히는 학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성장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게 하는 일종의 정신적 자살이라며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기능을 교환하고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동료/친구를 연결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제안한다.

지난 십여년 간 단 한 해도 고민 없이, 갈등 없이 보낸 해가 없었다. 그동안 나는 교사들이 노력해서 좀 더 좋은 교육을 펼친다면 더 많은 가능성과 희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보낸 세월이었다. 그러나 이젠 작은 결론을 내릴 때가 왔다. 이젠 그 어떤 개선으로도 이 체제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학교제도엔 희망이 없다.

다만 중요한 역설이 있다. 학교제도에 희망에 없다고 해서 인간에게 희망이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어떤 불합리한 제도 속에서도 푸르게 살아남는 자가 있으므로.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을 보고 이 제도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인간이 무언가를 배우고 싶을 때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사회. 이것을 가로막고 자신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면서 현대의 새로운 종교가 된 학교체제. 이 틀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으로서는 일리히가 생각하는 근본적인 사회변화에 대한 관점을 참고할 만하다. 일리히는 사회변화가 '제도에 대한 의식의 변화'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제도만 바꾸는 것도 아니고, 의식만 바꾸는 것도 아니고, 제도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학교제도에 대한 의존과 환상을 버리기 시작하는 것이 학교화된 사회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상품보다 인간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 서로 만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일리히가 말한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의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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