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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시와 소설

지도와 영토 - 미셸 우엘벡

by 릴라~ 2012. 3. 1.

공쿠르상을 수상한 미셸 우엘벡의 최신작. 그의 소설들 중 가장 소프트한 내용이라는데, 그래 그런지 거부감 없이 잘 읽혔다. 전작들은 호불호가 확연히 갈리는 문제작이라 한다. 이 소설이 주는, 완성보다는 미완에 가까운 느낌 때문에 이 소설이 내 취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작들을 읽고 싶어졌다.

<지도와 영토>의 장점은 이 소설이 그 안에 담고 있는 화두의 다양성일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제드 마르탱'이라는 예술가의 일대기인데 그것이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생각거리가 만만치 않다. 세 번에 걸쳐 큰 변화를 겪는 제드의 예술 세계의 변천 과정을 통해 예술가의 내면 및 그가 작업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으며 현대 예술의 경향성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가족 및 주변 인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는 서구 유럽이 현재 도달해 있는 관계의 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제드의 아버지가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택하는 장면은 너무 담담하여 오히려 깊은 슬픔을 느끼게 했다. 프랑스 비평계를 향한 작가의 조롱도 엿볼 수 있고 예술이 대중에게 소비되고 유통되는 방식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피카소의 그림은 그의 뒤틀린 내면을 보여줄 뿐이라고 말하는 등 작품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작가의 개인적 목소리를 듣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부분은 제드와 우엘벡(소설 속 등장인물) vs 제드의 아버지와 살인자의 상반되는 삶의 행로였다. 제드와 우엘벡은 작품 세계에 침잠하기 위해 고독을 자처했지만 몇 년을 주기로 세상에 자신의 작품을 공개했다. 이 '공개'의 의미는 굉장히 큰데 이는 그의 내적 작업의 외부와의 소통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제드의 작품은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논란이 되고 다양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로써 그는 수년간 몰입했던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한 방향으로 축적된 에너지, 자칫하면 그를 병적인 고립으로 끌고 갈지도 모르는 힘을 세상의 표면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자신의 작품을 세상 속에 위치시키고 그것에 합당한 역할을 부여했다. 그래서 제드는 전시회가 한 번 끝날 때마다 그간의 작업에 매듭을 짓고 새로운 장르를 실험할 수 있었다.

반면에 제드의 아버지는 평생 자신의 창조적 욕구를 자신의 주관 속에만 가두어둔다. 젊을 때 건축가로서 꿈꾼 바를 담은 설계도는 현실화의 가능성과 예산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한한 상상의 결과물로서 그가 죽을 때까지 작은 상자 속에 담겨 있었다. 그 결과 제드의 아버지가 겪을 수밖에 없는 내적 공허감은 그의 가족 관계에 파탄을 가져오고 그는 평생 불행하게 살아간다. 또 한 사람 중요한 등장 인물인 살인자, 그의 지하실에 있는 음습한 작업들은 그의 어긋난, 공개할 수 없는 뒤틀린 예술적 취향을 나타내며 그는 우엘벡을 처참하게 살해함으로써 그의 예술적 욕구를 만족시킨다. 그는 내면의 표현을 시도하지만 그에 걸맞는 예술적 형식을 창조하지 못한다.

작가 우엘벡은 그간 프랑스 평단의 혹독한 비판을 감내해왔다고 하는데, 소설 속 우엘벡을 죽인 살인자는 그러한 비평가들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살인자는 스스로 작품을 창조하지는 못하며, 원래 있는 것을 흐트러뜨리고 죽이고 파괴하는 조악한 방식으로만 자신의 예술적 욕구를 표출하는 인물이다. 그는 제드가 그린 우엘벡의 그림을 훔치고자 우엘벡이라는 사람을 살해한다. 작가 우엘벡에게 비난을 쏟아부은 평단이야말로 그러한 살인자와 같은 내면을 갖고 있다고 넌지시 알려주는 건 아닐까.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  제드의 첫 번째 전시회의 주제이다. 영토가 이 세상을 상징한다면, 그 영토의 축약판인 지도 즉 예술 작품이 더 흥미롭다는 설명은 가능하다. 예술은 작가가 자신의 특정한 관점으로 세상을 포착하고 이해한 방식이므로. 지도를 사진으로 담던 제드는 우리 시대를 설명하는 특정 직업군의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하고 말년에는 대지에서 받은 순간순간의 인상을 촬영하는데 시간을 바친다. 그리고 화면의 겹침을 이용하여 식물들의 영상 속으로 인공물이 파묻혀 사라지는 비디오그램을 남긴다. 그것은 문명의 종말이나 폐허에 가까운 느낌을 불러오는데 유럽이 도착한 미학적 지점이 그러한 것이 아닐까 했다. '식물의 압승'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유럽 정신의 종말을 연상시켰다. 그것은 이 세상을 근거 짓는 토대인 '주체'의 죽음이다. 주체가 소멸되고 나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지도(예술 작품)와 영토(대지)이다.

공쿠르상을 받을 만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결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문학에 부여된 과제는 타자를 억압하는 거대 주체도 아니고 타자에 흡수되는 익명의 주체도 아닌, 혁명의 주체도 고전적 의미의 역사적 주체도 자본주의적 주체도 아닌, 주체에게 새로운 역할과 자리를 부여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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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소설 > 프랑스소설
지은이 미셸 우엘벡 (문학동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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