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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교육 관련

바보 만들기 - 존 테일러 개토

by 릴라~ 2012. 3. 18.



참 이상하지 않은가. 똑같은 연령의 아이들을 똑같은 교실에 가두어놓고 시간마다 교과서를 바꾸어가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이. 30년을 공립학교 교사로 일하며 뉴욕주 올해의 교사상까지 수상한 저자는 '대량교육'의 폐해를 그 누구보다 설득력있게 짚어내고 있다. 읽고 셈하기 등의 기본적 지식은 100시간 정도면 누구든 마스터할 수 있는데 학교교육이 그 오랜 시간 동안 가르치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고. 특히 동일한 연령대의 아이들을 한곳에 모아놓음으로써 그 아이들로 하여금 과거-현재-미래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현재에 가두어두는 방식으로. 학교에 그토록 오래 다녔으나 책을 사랑하는 마음조차 길러주지 못한 채...

그의 비판은 학교교육의 속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하루종일 아이들을 학교에 붙들어두는 오늘날의 학교체제가 아이들을 일찌기 가정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가족과 같은 친밀한 관계와 지역사회와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건강한 성정을 기를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현대사회의 비인간화에 특별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저자의 개성적인 시각이다. 학교교육이 어떠한 인간성을 강화하는지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다른 책에서 몇 꼭지를 읽은 적이 있어서 익숙했으나, 이번에 그의 글들을 한데 모은 이 책에서는 '조직'에 대한 그의 놀라운 통찰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조직은 일면 사회와 비슷해 보이지만 온전한 가정과 온전한 사회가 줄 수 있는 관계의 질을 인간에게 결코 줄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자아가 아직 덜 여문 학생들이 가정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학교라는 '조직'에 장시간 머물게 됨으로써 진실한 내면보다는 자신의 겉껍데기를 내보이는데 익숙해진다는 통찰은 정말 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학교교육이 그곳에 종사하는 수많은 선한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체제의 특징상 자아의 건강한 성장을 저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속한 수많은 '조직'들이 결코 가정과 사회를 대신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감했다. 진정한 관계는 개인 대 조직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개인과 그가 발 딛고 서 있는 구체적인 장소와의 관계에서그 비롯된다. 우리를 둘러싼 사람 및 환경과의 직접적인 교감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의 의미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가치를 깨닫고 사랑하며 가꾸어가는 힘을 키워갈 수 있다. 

이 책은 단지 교육의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교육과 직접적으로 맞물려있는 현대문명의 작동 방식에 대한 깊은 우려를 담고 있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의 교감 능력 및 환경을 창조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삶 대신에 삶과 비슷한 것만을 영위하며, 얼마나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프게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제가 아는 사실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사랑이 있는 가정의 맛을 본 사람들, 아주 조금이라도 본 사람들이라면 자기 아이들도 그런 가정에 속하게 하고 싶어한다는 것. 제가 아는 사실 또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특정한 장소에 속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장소의 언덕과 거리, 강물과 사람들 속에 녹아들지 않으면 영원한 소외감 속에 너무나 비참한 인생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그로 의미를 찾아낼 줄 아는 것, 스스로 만족할 만한 목적을 찾아낼 줄 아는 것, 이것이 진짜 교육의 핵심입니다. 아이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가둬 놓은 채로 어떻게 이것을 이룰 방법이 있을지,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pp121)

조직은 사람들을 격리시킵니다. 처음에는 자아에게서 격리시키고 다음에는 서로간에 격리시킵니다. 일을 능률적으로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능률적일지는 모르지요, 하지만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누리는 길은 되지 못합니다. 조직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듭니다. 조직의 비인간적 기계론을 없애 버리면 조직으로서 기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이란 사회가 아니면서도 사회와 비슷하게 보인다는 사실, 이 뒤에 대량교육의 무서운 비밀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학교의 영역을 확대할 경우, 사회의 해체라는 위험한 문제가 바로잡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될 것이라고 제가 말씀드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거듭거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조직이 진짜 사회와 너무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회적, 심리적 욕구가 이를 통해 충족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심지어 원래 아무런 악의 없이 만들어진 모임들, 예를 들어 등산모임이나 체스모임, 아마추어 극단이나 사회운동단체 같은 것들도 자칫 전면적인 우정을 흉내내려 들었다가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모든 도시인들에게 익숙한 느낌, 군중 속의 고독과 같은 느낌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조직 활동을 많이 해 보고 이런 느낌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조직 활동을 여러 개 모아 놓더라도 온전한 사회에 속한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조직에 속한 사람이든, 아무리 전화벨이 자주 울리는 사람이든.

조직에서는 시작할 때 얻는 것이 여러분이 얻는 전부입니다. 조직은 더 좋아지지도 않고 더 나빠지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의미의 발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얄팍한 인간관계가 끝없이 되풀이되다 보면 결국은 병적인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의 '친구들' 또는 '동료들'이 여러분이 해 주는 이상으로는 여러분을 아껴주지 않는다는 느낌, 여러분이 어떤 식으로 자기 삶을 살며 어떤 희망과 두려움을 가지고 어떤 성취와 좌절을 맛보는지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느낌. 여러분이 '친구들'의 무관심을 서운해 할 때, 그들이 여러분의 친구일 수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공동의 이익을 넘어서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동료 조직원들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관계를 놓고 우리 자신을 속이려 들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회적 관계를 원하는 욕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인데, 조직을 통해서는 그런 관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해결책에라도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뜻이 무엇일까요? 적어도 단순한 동료 의식, 또는 공동의 목적을 통한 동지의식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pp100~102)

거짓된 사회에서 사람은 익명의 존재입니다. 스스로 익명이기를 원하기조차 합니다. 존재가 두드러진 사람에게는 타인들의 위협이 더 크게 닥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p112)

교사인 제가 보기에 학교는 이미 사회를 취약하게 만들고  가정을 취약하게 만드는 주범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활발한 접촉을 가로막고 서로 상대방의 생활에 진정한 관심을 일을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가정의 건전한 개념이 펼쳐지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빼앗음으로써 가정의 목을 졸라놓고는 가정이 가정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탓합니다. 심술궂은 사람이 현상중인 사진을 너무 일찍 현상액에서 꺼내놓고는 사진기사가 일을 잘 못한다고 욕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입니다. (pp118)

교육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든 그것은 독창적인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어야지, 틀에 맞춘 인간형을 찍어내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에게 커다란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창의성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자기 인생에 지표로 삼을 가치관을 세울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 자신이 있는 장소, 자신이 함께 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정신적 풍요로움을 키워 주어야 합니다. 세상에 중요한 일들이 어떤 것들이고, 사람이 살고 죽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pp119)




바보만들기
카테고리 인문 > 교육학
지은이 존 테일러 개토 (민들레(현병호),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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