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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시와 소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하) - 움베르토 에코

by 릴라~ 2011. 8. 14.

 




책을 읽으며 아주 긴~ '시간 여행'을 했다. 책을 읽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여행이었다.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어릴 적 고향 마을로 향나는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가 한 시절을 보냈던 솔라라의 저택과 마을 곳곳을 함께 거닐고, 그가 유년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 하나하나를 다시 만났다. 그것은 1930~40년대의 이태리의 한 작은 마을로 떠나는 여행이자, 우리들 자신의 어릴 적 기억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기도 했다. (스포일러 많음)

에코의 전작들과 달리 자전적 성격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다른 자전적 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주인공이 자신이 어릴 때 읽은 책과 만화, 음악, 영화를 주된 매개로 기억을 재구성한다는 점이다(정말 자세하고 긴 목록이 등장하는데 작가의 기억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60대인 주인공 얌보는 사고로 기억을 상실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과거의 흔적이 담긴 모든 것을 탐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에는 의미론적 기억과 자서전적 기억이 있다고 한다. 의미론적 기억이 객관 세계를 인식하는 기억-예컨대 눈앞의 물건이 빵인 줄 아는- 으로서 공적인 기억이라면 자서전적 기억은 개인적 의미가 있는 사적이고 삽화적인 기억이다. 두뇌에서 이들을 저장하는 해마가 다르기 때문에 얌보는 자서전적 기억만 잃었고 그래서 일상 생활엔 문제가 없지만 아내와 자녀도 알아보지 못한다. 과거를 통째로 잃은 것이다.

아내와 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기를 더듬어가던 얌보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가 안개에 싸여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곳에 그가 평소에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지만 이해해야 하는 진실이 있음을 직감한다. 그가 다락에서 상자들을 뒤지며 그 많은 책들을 하나하나 다시 읽어가며 세월을 거슬러 자신을 추적하는 작업은 놀랍기 그지 없다. 아니 주인공 얌보가 놀라운 게 아니라 작가의 섬세함과 집요함이 놀랍다. 지루할 만큼 많은 목록들이 등장하는데, 그 '구체성' 때문에 읽는 독자 역시 자기 자신의 과거의 지층을 탐사해보고 싶어진다. 아니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탐사할 수 있는 안목을 얻게 된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도 이 소설은 걸작이다.

얌보는 그 숱한 '종이 기억' 사이에서 중요한 사건 두 가지를 발견한다. 하나는 벼랑골과 그라뇰라에 얽힌 기억이다. 그라뇰라는 평범한 겁쟁이 청년이면서 용감하게 죽음을 맞았던 반파시스트 빨치산이었다. 본의 아니게 그라뇰라를 돕게 되면서 얌보는 전쟁과 죽음에 구체적으로 관련이 되고 그것이 그의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얌보의 유소년 시절이 바로 무솔리니 정권하였기 때문에 이 책의 많은 부분은 그가 솔라라 마을에서 경험한 파시즘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파시즘에 대한 작가의 비판은 그가 그와 상반되는 정치적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휴머니즘에 근거한 것이었다. 인간이 자유롭게 자기 몫의 사랑을 가꾸며 살아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삶을 가장 잔인하고 황폐한 형태로 만드는 것이 바로 파시즘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우리 나라 독재 정권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소설은 그렇게 한 개인의 내적 기억을 깊이 파들어가면서 솔라라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 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복원해냈다. 한국 소설은 이 점이 부족해 보인다(그리 많이 읽지 않았으니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사회상을 그리는 작품에서는 개인의 내면성이 약화된 면이 있으며, 개인에게 천착하는 작품은 그가 호흡하는 세상이 그저 배경으로만 기능하는 듯한 느낌이 있다. 이 소설은 철저하게 얌보의 개인성-사적 기억-에 주목하면서도 그의 두 눈을 통해 보여지는 세상의 풍경을 나란히 제시하고 있다. 그 풍경은 그것을 보고 느끼는 얌보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한국 소설은 개인성에 대한 이해가 좀 부족하지 않나 싶다.

얌보에게 중요한 또 하나의 사건은 고교 시절 때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첫사랑 릴라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마음에 '신비한 불꽃'을 일으켰던 여인. 릴라에 대한 기억을 추적하면서 얌보는 깨닫는다. 그가 한평생 릴라의 뒷모습을 좇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그 시절 릴라가 있었기에 그가 전쟁으로 얼룩진 유소년의 기억을 넘어서 다시 삶을 사랑하고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어릴 적 그의 마음에 '신비한 불꽃'을 일으켰던 것들, 자라면서 그가 넘어선 것들과 넘어서지 못한 것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얌보는 끝내 릴라의 뒷모습밖에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 소설은 어떤 암시만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우리 삶을 이끌어온 신비한 불꽃의 정체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일까. 얌보의 삶의 동인이었던 릴라는 우리를 매혹하는, 그러나 완전히 닿지는 못하는 '아름다움'의 표상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젊은 날에 본 그 표지들을 평생 따라다니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킨 것들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피날레는 성서의 '요한 묵시록'을 패러디한 것이어서 읽으면서 웃음이 났다. 성서에는 어린 양과 그밖의 잡다한 것들이 나오는데, 소설에는 얌보가 좋아한 만화 주인공들과 배우들이 등장한다. 최후에 어린 양이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릴라가 나타나는데 그녀의 얼굴을 보려는 찰나, 소설은 끝난다. 묵시록은 세상의 종말을 다룬 이야기이고 이 소설에서도 혼수 상태에 있던 얌보가 죽음을 맞는 대목 같은데 그 장면은 전혀 슬프거나 비장하지 않다. 그를 데리러 온 죽음의 사자들이 그가 어릴 적 '신비한 불꽃'을 느끼고 좋아했던 모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가까웠을 때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것들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 행한 많은 일들이 아니라 어릴 적 추억일지도 모르겠다. 세상과의 첫만남, 삶이 아직 낯설고 신비로웠던 때, 우리 마음 한 부분을 사로잡았던 것들...... 병자성사(임종시 행하는 가톨릭 의식)를 많이 집전했던 신부님 말씀으로는 대부분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마지막으로 한 말이 '엄마'였다고 한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의 경우, 50에 정신적 수명이 다하는 경우가 많지만 드물게는 70, 80에 가장 뛰어난 저작을 남기기도 한단다. 이 소설은 에코가 76세 때 썼다고 한다. '장미의 이름' 등 워낙 쟁쟁한 작품들이 많아서 이 작품을 가장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삶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뜨거운 사랑이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이 작품을 최고로 꼽고 싶다.



로아나.상여왕의신비한불꽃
카테고리 소설 > 기타나라소설
지은이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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